글이 막힐 때 쓴 작은 넋두리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아서 터질 것만 같을 때가 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서 너무 복잡할 때면 얼른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지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에 있는 것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야 했건만 무엇하나 쉬이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너무 많은 생각에 어디서부터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하는지 모르기도 했거니와,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는 이야기들이 언젠가 나에게 화살이 되어 날아온다는 사실과 듣는 이들의 마음에 알게 모르게 돌 한 덩이를 더하게 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생각이 말로 나오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아, 그래서 사람들이 일기를 쓰는구나.
답답함을 느끼는 현실 앞에서 손으로 한 자씩 눌러쓰는 일기는 생각을 밖으로 꺼내어주는 숨길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하얀 종이 위에 검은 펜으로 한 글자씩 꾹꾹 떠오르는 생각들을 눌러쓰다 보면 자꾸만 손에 힘이 들어갔다.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생각들을 손이 따라가지 못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나 보다. 그러다 보니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타닥타닥 타자기로 마음껏 써내려 가는 편이 내게는 훨씬 편했다. 잘못 써도 줄을 긋고 다시 쓰거나 화이트로 지익 지워버리는 수고로움 없이 그저 화살표 버튼 한 번만으로 다시 지우고 쓸 수 있다는 점도! 하지만 써내려 간 글이 나의 생각에서 떠났다 해도 나만 알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머릿속에 생각이 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온전히 나의 생각이자 이야기로 이뤄진 글들이지만 이 글을 내 것이나 내 것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내 머릿속이 아니라 공개된 곳에 자리할 때 나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는 마치 나에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쳐대는 대나무 숲과도 같은 것이 되었다.
조금씩 풀어놓은 글들이 하나 둘 모여 하나의 작은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지만 때때로 글이 막혔다. 무엇을 써야 하는 것인지 어렴풋이 알듯하면서도 뿌연 안개 틈에서 도통 답이 보이질 않아서 답답했다. 이럴 때면 손가락은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가만히 키보드 위에 올려져 있었고 화면 위에 조용히 깜박이는 커서는 빨리 글을 쓰라고 재촉하는 타이머처럼 느껴졌다.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책들만큼이나 다양한 글의 파도가 넘실거리는 브런치스토리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사실이 더욱 잘 느껴진다. 그들의 글을 읽다가 나의 글을 읽을 때면 곳곳에서 부족함이 눈에 밟혔다. 이 글을 누군가가 읽는다는 사실이 자꾸만 부끄러워질 때도 있다. 내가 하는 모든 것들에서 꼭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글들을 수없이 읽고 '맞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고개를 주억거려도 여전히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나를 종종 발견하곤 한다. '아무렴 어때? 이것도 나고 저것도 나고, 이 글도 내 글이고 저 글도 내 글인걸!'이라고 생각하면 좋으련만, 내 글은 왜 이토록 보잘것없게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에서 작가로 나오는 인물이 글이 막혀서였던가?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였던가? 어떤 이유에서 간 글을 쓰지 못하겠다고 했더니 주인공이 "내가 말했지? 작가는 기술자라고"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순간을 제대로 캐치했어야 했는데 너무 스치듯 봐서 상황도 대사도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저 창작가라고 생각해 왔던 작가가 기술자라는 부분은 굉장히 빠르게 마음속으로 날아들어와 박혔다.
기술자는 어떤 분야에서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뜻한다. 그리고 기술자들은 대개 그들의 기술을 연마하고 또 연마하는 꾸준함 속에서 더욱 성장한다. 이처럼 작가가 기술자라는 말은 아무리 내 글이 보잘것없이 느껴지고 아무리 의욕이 나지 않고 무슨 글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글을 써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많은 글을 써 내려갈수록 더욱 잘 쓸 수 있도록.
물론 누군가 나에게 작가라고 정해주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글을 쓰는 이 순간만큼은 나는 작가다. 이리저리 흐트러진 마음이었지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누가 뭐래도 나는 작가니까!'라는 생각으로 다시 마음을 부여잡고 어떤 글이든 꾸준히 써야겠다고 다짐한다. 나의 생각과 이야기를 늘어놓은 글 속에 정답은 없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무언가를 한다는 것 속에는 정답이 있을 것이니까.
글쓰기 관련 책을 읽다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면 일단 무작정 써 내려가보기.' 정말 아무 글이나 쓰면 되는 것일까 의아했지만 막상 글이 막히자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아무 글이나 당장 떠오르는 대로 적어 내려가다 보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깨닫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많은 생각으로 무거운 머리가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써 내려간 글이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글을 쓸 것이니까."
결국 나는 글을 써야 할 원동력을 글쓰기를 통해서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