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연필을 깎습니다
연필 깎는 즐거움은 직접 깎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입니다
연필이 뭉툭해지면 어김없이 대여섯 개의 연필을 줄줄이 늘어놓고서는 연필을 깎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사용하게 된 샤프심은 그저 그렇게 만들어져 언제나 나와는 상관없이 잊혀 갔습니다
샤프펜슬은 내게 거쳐간 녀석인지 혹은 나와 어떤 글을 쓴 녀석인지도 모르게
뚝뚝 부러지거나 새것으로 바뀌어 잊혀 갔습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샤푸심은 낯설답니다
써도 써도 날카로운 연필심은 참으로 정이 가지 않습니다
어쩜 그리 다름이 없고 개성도 없고 변화도 없는 획일한 물건일까 생각하면
참도 정이 가지 않습니다
세월이 지남에 무뎌지고 너그러워지고 안아주고 끌어주고 헤아려주는 연필이
나는 참 좋습니다
편안합니다 정겹습니다
그래서 연필을 사용합니다
강아지도 미소 짓고 밥 주고 토닥거려주는 이를 따르고 알아봅니다
연필로 쓰다 보면 나를 안아주는 듯 보듬어주는 듯 끄덕여 주는 그 넓은 아량에
내 마음은 사랑살랑 그네를 탑니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새로운 것에 한눈팔 때도 있음이니 이 또한 인지상정인가 봅니다..
그럼에도 차츰 시간이 흐르면 결국 오래 정이든 물건에
다시금 눈길이 가는 것은 왜일까요?
연필은 개성이 있습니다 다름이 있습니다 고집이 있고 자기만의 성깔이 있습니다
어떤 놈은 길고 더러는 짧고 색상도 다르고 살살 잘도 나오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꼭꼭 눌러써야 겨우 보일랑 말랑 흐리게 나오는 녀석도 있습니다
굵은 녀석이 있는가 하면 짧기도 하고 하루 열두 번 변하는 마음처럼
각진 녀석이 있는가 하면 동글한 보들이도 있답니다
생각이 다르듯 색상도 다양하고 고무가 달린 녀석 맨질맨질한 녀석 각양각색입니다
새로 쓰는 멀뚱이가 있는 반면 오래 써서 정이 들었는데 차츰 작아진 몽당연필도 있습니다
작고 보잘것없고 껍질이 벗겨져도 어쩜 그리 정겹고 반갑고
내 손가락처럼 편하고 아늑한지 모를 일입니다
연필도 구두도 사람도 정이 들어야 제맛이요
그 편안함은 하루 이틀에 되는 일은 아닌 듯합니다
세월이 빚어놓은 사이만큼 편함이 어디 있을까요?
그리하여 울퉁불퉁해도 칼로 아삭아삭 깎는 수고 아닌 수고
하나하나 모두 다르게 깎이는 연필
행복한 이빨을 드러내는 당당하며 말쑥한 연필은 아무래도 나를 닮은듯하여
정겹고 반갑고 웃음으로 반겨줍니다
그래서 털털하고 사각사각 닳아버리는 연필은
인생을 떠올리게 하며
시간의 의미를 알게 하여 줍니다
써 내려가는 사연만큼 닳아
뭉툭해지는 연필
이내
연필을 깎습니다
사그락 사그락 껍데기를 벗습니다
아사삭 아사삭 체면 치래를 벗어버립니다
샤각샤각 군더더기를 베어냅니다
살근살근 때를 불려 벗겨내듯
내 영혼 더러운 찌꺼기들을 벗겨버립니다
미련도 뚝뚝 끊어버리고
아쉬움도
욕심도
연필 깎지 벗겨버리듯 모두 버려둡니다
방금 샤워를 하고 나온 것처럼
머리를 감은 후의 깔끔함처럼
목욕 후 운동 다음의 개운함처럼
산뜻한 영혼의 목욕을 시킵니다
내 마음 내 영혼이 맑아지고 깨끗해지며 새로워집니다
연필을 깎는 것은
영혼을 어루만지어 휴식을 주며
마음을 가다듬고
비우고 비워
새롭게 하는 소박하고 거룩한 의식입니다
세상엔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립니다
내 영혼엔 생동감이 내립니다
가지런히
연한 핑크빛 연필나무 그 사이로 깜장 심이 예쁘게 다듬어집니다
마음도 그렇듯 예쁘장하고 참신하게 다듬어집니다
물론 연필을 깎다 보면 움푹 파이게 깎을 때가 더러 있습니다
심지어는 연필심이 부러지기도 합니다
너무 많이 비우는 내 영혼
내 마음은 때로 아쉬워하기도 하고
잠시 흐느껴 울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시 깎기도 하고
더러는 다음번 연필심이 닳아 다시 깎을 무렵이면
이쁜 모양으로 다듬어집니다
잠시간 아쉽고 마음이 찌름처럼 아파도
인내해야 합니다
때론 막막하나마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람입니다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웃을 줄 알고 더불어 행복을 궁리하는 인간입니다
연필도 말없이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거든 ..,
연필을 깎으며 비웁니다
연필을 깎으며 내 영혼은 살이 찝니다
글을 쓰노라면
사랑을 이야기하다 보면
손가락이 움푹 들어가 꽤나 아플 때가 있습니다
삶은 그래서 의지하라 합니다
더불어 애써서 살라합니다
오늘도 연필을 깎으며
마음은 멱을 감습니다
연필을 바라보며
내 삶을 떠올려
행복이 어디 있는지 한참 숨바꼭질을 합니다
세월의 바람개비가 파르르 잘도 돕니다
휘파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