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 무제.
해외에서 살아보기, 독립하기, 제주도에서의 한 달 등.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의 생활을 꿈꾸곤 한다. 홀로서기 예행연습, 길바닥에서 영감 얻기, 탕진 잼, YOLO 등 각양각색의 이유가 등장한다. 나도 매일 같이 고된 노동의 연속 덕분인지 꿈만큼은 달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꿈만 꾸기엔 내 청춘 이제 시작인데, 꿈은 그만 꾸고 꿈을 살아보자!'라는 막무가내 식으로 지구본을 굴렸다.
총 세 나라가 타깃이었다. 일본 도쿄에서 한 달, 미국 서부에서 동부 자동차 횡단,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 열차.
"나 이렇게 세 나라 중 한 곳을 갈 건데, 어디가 좋을지 고민이야."
'여행 좀 다녀봤다' 하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일본은 방사능이 어쩌고저쩌고. 아니야, 그래도 가깝고 문화도 친숙하니까 어쩌고저쩌고. 또 다른 한쪽은 미국? 얼마 전 연예인 누구가 돈 백에 횡단했다며 어쩌고저쩌고. 그래도 혼자면 치안이 좀 걱정이니까 어쩌고저쩌고. 미국은 너무 살기 좋아 마지막으로 가야 하는 지역이라며 어쩌고저쩌고.
"그래. 그럼 러시아는?"
그러고 보니 주변에 러시아를 다녀온 사람이라고는 찾기가 힘들고 있어 봐야 블라디보스토크 밖에 안 가봤단다.
"그럼 곰새우랑 킹크랩 많이 먹었겠네. 화폐는 뭐더라? 유로?"
세상에. 지금 생각해보니 나 자신이 조금 창피하다. 어쨌든 나머지 두 나라보다 생소한 러시아로 여행지를 택했으나, 변덕이 발동하여 앞만 보고 달리는 좁은 열차 안을 생각하니 나랑은 안 맞겠다 생각하여 다른 지역을 물색해야 했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노을이 지는 동부간선도로를 달리는 중, 아뿔싸. 톰과 제리에서 가끔 톰의 머리 위에 전구가 반짝반짝했던 그 순간처럼 내 머리 위에도 스쳐 지나가는 기억 덕분에 머리 위에 전구가 몇백 개는 반짝였다. 러시아 '카잔'에서 유학하는 친구 녀석이 있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시차는 가볍게 무시하고 전화를 걸어버리는 인성 재평가의 순간이었다. 연락하고 지낸 시간에 관계없이 너무나 반갑게만 느껴진 나머지 카잔에서의 계획과 목적 거주지 등 1부터 100까지 즉흥 그 자체였다. 일사천리로 티켓과 숙소를 결제하고 들뜨다 못해 달나라로 가버린 내 마음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로 돌아가 미쳐버린 나를 막고 싶을 지경이다. 충동과 무계획의 여파. 러시아 카잔에서 생활한 지 약 2주, 남은 기간 40여 일.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이미 녹아버린 나 자신과 녹을 수밖에 없는 카잔의 매력에 대해 기록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