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라는 게 사람을 주저하게도 하지만 뭘 하게도 만들어

by gather rosebuds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더 이상 오빠라고 부를 수 없는 나이로 채워질 때 깨달았어, 나이가 들었다는 걸.

고1이었어.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날부터 10년도 넘은 시간이 흘렀을 때, 그럼에도 리본을 포기할 수 없었나 봐

뒤통수 반 만한 리본 머리핀을 머리에 하고 종종 여러 날을 출근한 이후 용기를 얻었지.

'오늘은 파란 리본을 셔츠에 매어야겠어' 결심을 하고 출근했어


기분이 좋아, 나는 리본이 좋거든

또각또각 내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소리를 내는 스틸레토 힐도 마음에 들었고

스텝을 옮길 때마다 살랑살랑 내 걸음을 따라 파란 리본이 흔들리는 것도 완벽했어, 예산을 주무르는 그놈이 썩소를 날리기 전까지는.


'아, 이쁘긴 한데 나이에 너무 안 맞는 거 아니야? 리본 ㅋㅋㅋ'

'아, 그래요?'

친분도 없는 놈이 비웃다니. 관심 꺼라! 이럴 걸 그랬나. 웃어넘겼지만 파란 리본은 그날부터 서랍에 박혀있어, 나와의 출근길을 함께하지 못하고.


파란 리본보다 몇 배는 컸던 까만 리본 핀을 아무도 보지 못했던 건, 사람들이 내 뒤통수에는 관심이 없었던 거야. 뒤통수라서 못 봤던 거지. 머리카락이 까만 데다 까만 리본핀을 하니까 모를 수밖에.

파란 리본의 서사는 이렇게 끝났고 이 전에도 비슷한 역사가 있었지.


빨간 트렌치코트는 너무 빨갛다고

노란 블라우스는 광택이 난다고

하얀 바지는 너무 과감하다고


한 소리씩을 들은 내 옷들은 점점 옷장을 나오지 못하고 쌓여갔는데, 이건 훈수를 둔 사람들 잘못만은 아닌 거야. 주인을 잘못 만난 거지, 주인이 20대였는데도 말이야. 몇 번씩 입지도 못한 것들이라 세탁해서 굿윌스토어에 기부했더니 기부금영수증을 8만 원 넘게 끊어줬네? 슬프지만 결말은 그래도 개꿀이었잖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 일이 떠올라. 피아노를 너무 배우고 싶었는데 엄마가 학원을 안 보내줬어. 조르다가 중2 때 아파트 상가에 있는 피아노 학원을 겨우 다닐 수 있게 되었어. 학원에 있던 유치원생 꼬마가 '저 큰 언니는 왜 피아노 배워?' 이 말을 듣고 갑자기 부끄러워지는 건 왜였을까. 마침 학교 선생님이 엄마와 면담을 하시고는 '피아노는 초등학생 때나 다니고 끊는 거야.'라고 하신 덕에 두 달도 못 채우고 그만뒀어.

체르니 100번을 겨우 들어가던 참이었는데.


그런데 나이라는 게 말이야, 사람을 주저하게도 만들지만 뭘 하게도 만든대.

응? 난 여태 주저하기만 했는 걸?

나이가 덜 든 거야, 설마? 아니겠지? 객관적으로 내 나이는 많이 많은 게 확실해.


그럼 내 나이는 나에게 뭘 하게 만들고 있는 걸까.

당장 내일 일과를 예상해 보자.

올해가 가기 전에 마지막 남은 연가 하루를 쓰는 날이니까,

- 우선 평소보다 1시간 20분 늦게 일어날 거고

- 8년 전에 엄청 유명했다던 도깨비를 볼 거고, 오징어게임 2가 나오는 날이지만 나는 모두가 '네'라고 할 때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니까 오겜은 패스하고 아마도 지금 도깨비를 보는 것처럼 약 8년 후에 시즌 1을 보기 시작할 수도 있겠어. 아무튼 도깨비를 보고

- 무용실 대관해서 2주 전 수업 때 복기한 순서대로 연습을 할.. 그냥 학원 수업을 들을까, 수업료나 대관료나 똑같으니까 이건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둘 중 하나를 실천하고

- 일요일에 조깅을 하다 넘어지는 바람에 3일을 쉬었으니까 내일은 꼭 5km를 반드시 달리고

- 저녁이 되기 전에 꿀잠을 자고 싶은데, 아! 달리기를 밤으로 미뤄야겠다.


이건 모두 평소에 하던 건데, 내가 나이 들었다고 필살기로 하는 건 아닌데.

내일 일과 말고 내년을 예상해 봐야겠구나.


그리고, 이 말을 던진 예소연 작가님의 글을 더 파 봐야겠어.

-소설보다 여름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