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하바나, 뜨리니다드, 앙꼰
색감 있는 건물에 올드카들,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열정적인 사람들.
여행책 속에서 쿠바는 시간이 멈춘 나라로만 그려져 있었다.
당시엔 여권에 쿠바 입국 도장이 찍혀 있으면 미국 입국이 불가능해서 쿠바 트래블 카드를 별도로 구매해야 했다. 준이에게 아는 대로 간단히 쿠바의 역사를 설명해 주고 하바나로 향했다.
낭만이 물씬 묻어나는 행복한 나라로 알려졌지만 우리가 가 본 쿠바는 낭만으로만 표현하기는 어려운 나라였다. 미국의 경제봉쇄로 본의 아니게 과거의 모습을 유지하게 된, 우리와 똑같이 현실적인 욕망을 지닌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특유의 낙천성과 뻔뻔함으로 관광객인 우리를 대했다. 속물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모습을 관광객들에게도 보여준다는 점이 쿠바의 매력이기도 했다.
시가 공장을 견학할 때는 근무시간인데도 직원들이 따라오며 빼돌린 시가를 싸게 주겠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했다. 관광객과 현지인의 통화가 다르기 때문에 차익을 노려 통화를 바꾸려는 사람들도 호시탐탐 우리를 노렸다. 빵집에서 만난 할머니는 죽은 남편이 중국인이어서 동양인인 우리가 친숙하다고 한참을 얘기하더니 결국은 돈 바꿔 달라고 했다. 거리에서 영어교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아저씨는 그날이 자기 딸의 생일이라면서 통화를 바꾸자고 했는데 저녁에 해변에서 그 가족과 마주치는 바람에 딸의 생일이 아닌 것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람들이 밉기보다는 그런 능청스러움이 재밌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갔을 때 이런 모습들은 물자부족 때문인 것 같았다. 돈이 있어도 물건 구하기가 힘들어 보였다. 슈퍼마켓 물건들은 오직 한 브랜드씩만 진열되어 있었고 앙꼰해변에 올인클루시브(all inclusive) 호텔 음식은 양념이 거의 없고 단조로운 맛이 났다. (그것이 오히려 한국에서 찾던 유기농 건강식단이 되는 역설을 보여주긴 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하바나 민박집주인아저씨는 몇 번이고 강조했다.
물자가 부족해도 사람들은 평등하고 당당해 보였다. 사회주의 국가여서인지 백인과 흑인이 진심으로 평등해 보였고 여성들의 옷차림도 당당한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다. 몸의 실루엣이 드러나는 쫙 붙는 옷을 입는데 불룩불룩 겹쳐지는 뱃살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였다. 할머니들까지 몸에 붙는 민소매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여자들은 애 낳으면 배 나오고, 나이 먹으면 얼굴도 몸도 처지는 게 당연한데, 남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어떻게든 배를 가려보려고 헛된 애를 써왔던 내 모습과 비교되었다.
그런데,
쓰다 보니 역사가 어떻고 현실이 어찌 됐건 관광객의 기억 저편에 쿠바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게 맞는 것 같다.
럼주를 마시며 바라보는 쿠바의 저녁 하늘은 붉은 오렌지빛과 분홍이 섞여 아련하면서도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웠다. 좁은 골목엔 올드카들이 영화처럼 서있고 길거리 햄샌드위치는 들어있는 게 거의 없고 주스도 설탕 듬뿍 이지만 맛있었다. 모히또를 마시며 앙꼰해변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듯이 무서울 정도로 파랗다. 아름다운 동네 뜨리니다드엔 올드카뿐만 아니라 증기기관차에 심지어 마차까지 실생활에 이용되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 길거리에 음악이 흐르고 술집에선 공연이 시작된다.
올드카들이 점점 새 차로 교체되고 있다고 하니 우리보다 늦게 쿠바에 갈 사람들은 아쉬울 것 같다.
발걸음이 쿠바 앞에서 멈춰있다면 한 번쯤은 이 흥미로운 나라에 다녀와도 좋을 것 같다. 쿠바 역시 개방의 물결을 타고 있다고 하니 서둘러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