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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Jan 05. 2023

나의 남사친에게

퇴사 후 다닌 재수학원에서 영준을 만났다. 어두운 복도에 쭈그려 앉아 있다가 나를 보면 어린애처럼 혀를 쭉 뽑아 내밀어서 당황시켰다. 자판기 앞에서 영준이 건넨 첫마디는 “백 원만.”이었다. 한두 번 주다가 그의 주머니를 뒤져 보니, 동전이 나왔다. 다음엔 빈주머니를 뒤집어 보이기에 붙잡아 앉혀 양말 속을 뒤지니 지폐가 나왔다.  


멀쩡한 핸드폰을 두고도 약속 없이 집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수업이 언제 끝날지도 몰랐고 묻지도 않았다. 내가 무심코 지나쳤을지 모를 정류장에서 하염없이 서 있었다. 처음엔 좀 놀랐고, 이 후 반기며 환하게 웃는 얼굴이 보여 좋았다. 어느 쌀쌀한 날, 정류장에 있던 그에게 많이 기다렸냐고 묻자 기다리는 동안 행복했다고 답했다. 순간 맑은 공기가 혈관을 타고 들어와 영혼을 채우는 느낌이었다.   


그가 이집트와 인도에 갔을 때였다. 피라미드 앞에서 장엄함에 한껏 부풀어지고, 갠지스 강에서 숙연해지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가 원했던 전공은 ‘문예창작과’였다. 감정을 건져 올려 툭 던지듯 쉽게 표현하는 재능에 감탄한 적이 많다. 그는 한글 자판이 없는, 도저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넓은 세상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영어로 쓰인 메일을 앞에 두고 거리만큼이나 벌어진 격차를 실감했다.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조금 달라져서, 예전처럼 머리를 쥐어박거나 농담을 던지는 일이 망설여졌다.      


삼 수 끝에 결국 부모가 원하는 의대에 진학했다. 산골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응급실 밤샘 알바로 돈을 모아 주식을 했다. 대출까지 더해 투자한 돈은 어느새 몇 억으로 불었다. 거액 투자자만 가입할 수 있는 클럽에서 삼 년 동안 무려 백억을 벌었다고 했다. 너만 보여주는 거라며 통장을 내밀었는데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백억이 뭐? 그게 엄청나게 대단한 건가.’ 몽롱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먹고 싶은 걸 묻기에 고작 파스타를 댔다. 브랜드 매장에서 옷을 입어보라고 했다. 가격을 보고 놀라 그냥 나왔는데, 가능하면 시간을 그때로 되돌리고 싶다. 그럼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처럼 양손 가득 들고 나올 것이다.  

        

친구 미영과 영준은 나의 소개로 만나 사귀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그의 아버지가  간호사인 미영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작은 누나 결혼식에서 그의 아버지를 처음 뵈었는데, 누나의 직업도 간호사였다. 내가 인사드릴 동안, 미영인 예식장의 으리으리한 기둥 뒤에 숨어 있었다.      


그는 헤어지고 잔뜩 취해 전화를 걸었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울면서 노래를 부르고 수화기 놓치는 소리, 부딪쳐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짠한 마음에 나가면 눈과 코끝이 뻘겋고, 슬퍼 보였다. 비틀거리는 그를 붙들고 괜찮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두 번째 헤어졌다는 소식에는 화가 나서 연락을 끊었다. 둘을 보며 절절했던 사랑도 식고 식었던 사랑이 다시 불붙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사랑의 가벼움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 연애는, 우연히 술집에서 만나 시작되었다고 한다. 직업도 공무원이라 반대할 리 없다고 생각해서 아파트에 살림을 다 채워 넣고 동거를 했다. 혼인신고만 하면 끝나는 상황이었는데, 아버지가 이번엔 여자의 키가 난쟁이처럼 작다며 반대했다. 그는 아직도 결혼하지 않는 방식으로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있다.      


조용한 동네의 비디오 가게 주인을 꿈꾸며 한가롭게 종일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살고 싶다고 했다. 오랫동안 자신과 부모의 바람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건 아빠의 장례식이었다. 왕년의 멤버들을 다 데리고 달려와 주었다. 이제는 그동안의 허무와 우울을 딛고 어린애처럼 기쁘게 원하는 곳으로 달려가길.      


글쓰기 선생님이 얼마 전 남사친 부인의 부고를 받았다고 했다. 친밀한 사이에나 통할 법한 ‘느낌이 어때?’ 하고 질문한 것부터 참석여부나 부의금과 관련된 고민을 들려주었다. 문득, 그의 부고를 받는다면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시절을 함께 해서 좋았다고, 마지막 길도 함께 있어주겠다고 말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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