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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Feb 23. 2023

허심탄회도 병

남편이 수술하고 한 달 남짓쯤이었다. 남편과 카페에 갔는데 친한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너의 남편에게 줄 귀한 인삼을 들고 당장 오겠다는 것이었다. 갑작스럽기도 하고 귀한 것이라 하니 부담스러웠지만, 주소를 찍어주었다. 올 때쯤에 맞춰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나갔다. 언니는 주차가 마땅치 않아 한 바퀴를 더 돌았고, 잠깐 신호에 걸렸을 때 인삼과 커피를 빠르게 맞교환한 후 멀어졌다.


저녁에 전화를 걸어 감사인사를 전하는데 언니는 말을 자르고 속사포처럼 말했다.

"근데, 너 왜 이렇게 살이 쪘어? 횡단보도에 서 있는데 못 알아봤잖아. 살 좀 빼~ 그게 뭐야. 그리고 머리 파마했지? 진짜 안 어울려. 완전 아줌마 같아. 내일 당장 가서 풀어. 알겠지?"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 그래요?'를 연발하던 나는 전화를 끊고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암 수술과 간병 등 몰아치는 변화 속에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가장 약해지고 보잘것없다고 느껴질 때, 절친이 건넨 첫마디가 '괜찮아?'가 아니라 '살 좀 빼.'라니. 더군다나 오랜 아킬레스건이자 발작버튼은 언제나 '살'이었음을, 이십 년도 넘게 알고 지낸 언니는 나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고심 끝에 '잘 챙겨주는 건 너무 고맙지만 나는 소심해서 그런 말 굉장히 상처받는다, 앞으로 외모 지적은 안 했으면 좋겠다'라고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언니는 이후로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시시때때로 언니를 생각했다. 먼저 연락해서 허심탄회하게 그때 예민하게 반응했는지 털어놓고도 싶었다. 그러나 대학교 때 "뒤에서 사람들이 너 얼마나 욕하고 다니는지 알아? 그러니까 성격 좀 고쳐."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또, 교사로 취업을 준비할 때는 "넌 애들 다루는 걸 버거워하는 것 같아. 교사는 너랑 안 맞아."라고 했다. 결혼 후에는 "너 그동안 팔자 좋았잖아. 그러니까 이제 고생 좀 해."라든가, "네가 원래 좀 나약하잖아."라고 말했다.


훌륭한 외모를 갖춘데다 자신만만하고 성공한 지인에게 그런 말을 듣다 보면, '아~ 나는 고쳐야 하는구나, 나는 나약한 사람이구나, 이 직업이 나랑 맞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물론 역사적으로도 입에 혀처럼 구는 이보다 쓴소리 하는 이가 충신이듯 진심을 오해하진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처한 상황과 대처하는 방식이 다르다. 단정 짓는 사람에게 굳이 나를 명할 필요도 없다. 나를 나보다  아는 사람은 없고, 자신의 삶은 자신이 제일 진심이다.




새아빠는 기  언니에겐 조심스레 대하면서도 유독 내게만 말을 함부로 하고 수시로 '제기럴, 니미럴.'을 찾아댔다. 그래도 '엄마한테만 잘하면 되지.' 하고 내내 참았다. 불편한 마음을 안고 지난주 베트남으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둘째 날 기어코 사달이 났다. 나트랑 빈원더스의 '롯데리아'에서 햄버거와 치킨을 먹는데 남편이 좋아하는 닭다리가 보이길래 권했더니 새아빠가 말했다.

"아주 눈꼴셔서 못 봐주겠네~내가 다리 먹을까 봐 그래? 제기랄~안 먹어 ~~ 치사해서 안 먹어 ~안 먹을 테니까 내려놔~네 남편도 싫어하잖아. 저거 봐라 저거 봐. 안 먹고 그냥 내려놓잖아~ 싫다는 거야~억지로 먹이면 체한다~너 남편 병원에 실려가게 하고 싶어?"

점점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팠던 남편을 두고 병원 운운한 건 선을 넘었다. 나는 닭다리를 권한 죄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가라앉지 않았고 한 번은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쿠아리움에서 멀찍이 앉아있던 아빠에게 다가갔다.

"아빠, 저 좀 삐졌어요. 밥 먹을 때 기분이 좀 나빴어요."

아빠는 듣자마자 성질이  듯 모자와 선글라스를 잡아 홱 벗으며 벌떡 일어나 윽박질렀다.

"나도 아까부터 기분 이상했어! 나도 기분 나빴어~ 너 뭐? 너 뭐!!한 마디 했다고 그걸 가지고 꽁해서는~그냥 듣고 넘기면 되지~알았어, 알았어. 앞으로는 먹는 거 가지고 너네한테 한 마디도 안 할게. 됐지?"

"그게 아니라요. 적당히 한 두 번만 말씀하시면 되는 걸 왜 장난스럽게 계속 얘길 하세요?"

나도 휩쓸려 대화가 어느새 감정적인 질책으로 바뀌어 있었다.

"장난 아니고~진담이라고!! 체할까 봐 그랬다구!!"

"왜 자꾸 사람을 무시해욧!!"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내지르고 아쿠아리움을 나와 혼자 선착장으로 와버렸다. 걱정과 조마조마한 눈길로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이 뒤따랐고 가족여행 분위기를 망쳐 자책했지만, 사실은 내 여행이 망한 것이었다.




누군가 내게 인간관계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으면, 항상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라고 조언했다. 그 관계를 놓지 않으려는 마지막 노력이고, 그마저 통하지 않으면 마음에서 거리를 두라고 말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좋아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에게 상처받고 대면대면해지면 삶의 의욕을 잃고 회사도 가고 싶지 않았다. '따로 얘기 좀 하실까요?'로 시작해서 솔직하게 다 말한다면 어떤 오해라도 다 풀릴 것 같았다. '영원한 피터팬' 다운 순진한 발상이었다.  


솔직함이 최고의 미덕이라 여기고 살았다. 그러나 경험을 돌이켜보건대, 진심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도, 상대가 원치 않을 때도 많았다. 말로 다 풀어내지 못해 오해가 더 쌓이기도, 관계가 무거워지기도, 적을 만들기도 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스스로 괴로워질 뿐만 아니라, 내가 상대방 만나기를 꺼려하니까 스스로 그 사람을 만날 자유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미움이라는 것은 상대를 만나기 싫다는 말이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 가지 않겠으니 너도 이곳에 오지 마라'는 출입금지와 같아요. 결국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아야 이 세상 어디라도 자유롭게 갈 수 있고, 누구라도 편하게 만날 수 있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꾸 감옥으로 몰아넣습니다.
                                                      
법륜스님  《행복》 중에서


대부분 가까운 관계, 계속 봐야 하는 관계에서 미움이 생겨난다. 그가 있는 자리에 가고 싶지 않게 되면서 내가 나를 감옥에 가두고 내 세상은 점점 좁아지게 된다.


쌈닭이 돼 가며 인간관계에 큰 결함이 있음을 깨닫는 요즘이다. 불편한 마음을 먼저 알아채 주고 오해를 풀어주면 정말 고맙겠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노망 난 피터팬처럼 일일이 내 속 좀 봐 달라 호소하고 실오라기 하나 없이 다 깐 후 핑크빛 화해로 물드는 망상 속에 살 수는 없다. 관계가 틀어졌을 때 우울했던 건 모두에게 사랑받고 모두와 잘지내고 싶은 욕심때문이었다. 그저 어제의 불편한 마음은 잊고 오늘을 새롭게 맞이하는 거다. 낡은 비디오테이프 속 영상을 반복재생하거나 그 테이프를 들고 상대에게 가서 틀며 훌쩍거리지 말고 쓰레기통에 과감히 던져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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