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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Dec 20. 2023

빌드업


임플란트 수술  부운 입술 사이로 흐르는 침을 닦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울리는 전화가 윤진쌤이 아니었다면 절대 안 받았 것이다. 원래도 발랄한 쌤은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그것이 삶에 서광을 비춰줄 채용공고라는 걸 알았나 다.


고문에 가까운 아득히 희망이었므로, 앞서 지원한 2개월 단기 채용공고외려 마음이 기울었다. 결과는 두 군데 모두 불합격이었다. 사서자격증이 없는 이들도 지원한 터라 당연히 합격할 줄로 생각해서 당황스러웠다.


초단기 기간제도 다 떨어졌는데, 공무직이라니. 이미 마음으로 포기하고 고개를 젓고 심드렁했다. 시기도 어려웠던 것이, 남편이 장염을 진단받고 3주 넘게 원인 모를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다 췌장염으로 입원했고, 병원에서 다시 과민성 대장염 진단을 받았다. 결국 스트레스가 문제였다. 초침소리에도 잠을 못 이뤄 시계를 분해해서 밖에 내놓을 정도였다. 무슨 말만 해도 날이 잔뜩 서서 사사건건 부딪혔다. 시엄마는 다단계 마수에 걸려들어 재벌도 아닌 분이 천 이백만 원어치 건강식품을 사들였다. 공부하는 내내 시엄마와 통화하며 설득했다. 나만 봐도 아주 엉망이었다. 마라톤에서 넘어져 응급차를 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빨을 두 개나 뽑고 신경치료에 컴활 자격증 공부까지 병행하느라 완전히 지쳐 있었다.


우선 남편에게 쏠려 있던 근심을 거두었다. 일부러 큰 서점에 가서 훑어보고 고민 끝에 한 권을 구입했다. 하나로는 부족할 듯하여 다른 책을 인터넷으로도 주문했는데, 똑같은 책이 이틀 간격으로 두 번이나 오배송됐다. 희한한 일이었다. 연락 오면 물어주지 하고 그냥 뜯어서 공부했다. 결국 단 4일 동안 책 세 권을 다 봐야 했다.


밥 먹으러 가면서 발길을 재촉할 때쯤, 과목이름조차 가물가물한 백발 성성하셨던 고등학교 선생님의 말씀이 퍼뜩 떠올랐다.

"여러분~~ 내가 어제 진급시험을 봤는데, 공부할 시간이 너무 없는 거예요. 여섯 과목을 단 35분 만에 훑었어요. 그리고 합격했죠. 집중하면 불가능한 건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러니 언제가 됐든 간에 포기하지 마세요"

말씀을 밥알처럼 씹으며 도서관 앞 한식뷔페에 다. 식당엔 뉴스가 틀어져 있었고 생전 뉴스를 안 봐서 밥만 먹다 고개를 들었는데 ' 럼피스킨 병'이 헤드라인 뉴스로 쓱 지나갔다. 다음날 필기시험 일반상식에 그 문제가 나왔다.


이런 내용의 기도를 했다. '만큼만 돌려주세요. 더는 바라지 않습니다.  수 있는 최선을 다 쏟을 테니 그만큼은 꼭 보상해 주세요. 떨어진다면 깨끗이 인정하고 절망도 않고 자책도 말고 일어나 다른 길을 찾도록 도와주세요. '


필기에 붙은 후, 면접을 위해 배수의 진을 쳤다. 고맙게도 남편이 집을 비워준 이틀 꼬박을 실전처럼 연습하고 휴대폰으로 녹화하고 모니터링했다. 엔드게임의  닥터스트레인지가 된 심정으로 상상 속에서 집게손가락 하나를 계속 들어 올렸다. 내가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 나게 하는 것뿐이라고.


기간제  군데에서 모두 떨어진 것이 오히려 득이 되었다. 출근 대신 공부할 시간을 넉넉히 벌어주었다. 남편이 계속 아픈 것도 마음을 굳게  잡는 계기가 되었다. 치통, 발치도, 부상도, 임플란트 수술도 이를 악물게 했다. 심지어 미용실 가서 실컷 외모 지적받고 자존감 왕창 떨어진 조차 나를 객관적으로 보는 계기가 되었다. 실실 쪼개며 여유일관했던 면접실패를 거울삼아, 미소를 싹 걷어내고 절박함을 차려입었다.


몇 해 전, 취업 특강을 위해 수십 권의 책을 보며 연구한 그대로  면접을 준비했다. 직종무관 공무직 면접후기를 전부 찾아 공통질문을 뽑고, 이력서, 자소서를 토대로 예상 압박 질문을 뽑은 후, 원고를 쓰는데만 하루가 꼬박 걸렸다. 달달 외워 스무 번 이상 실전처럼 연습했. '꿈날개'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셀프화상면접도 적극 활용했다. AI면접관이 묻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무도 몰랐기에 응원하는 이 하나 없어 조금 쓸쓸했다. 스스로  "너는 될 놈이야. 될놈될!!"을 외치고, 내가 강의했던 멘트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까먹어도 괜찮다. 면접관은 내 원고를 모른다. 두 줄, 아니 한 문단 전체 날려도 상관없다. 그저 툭치면 툭 나올 때까지 연습해라. 아마도 실전에선 준비한 것에 반의 반도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키워드를  뽑아 외워라. 그럼 핵심은 놓치지 않는다. "


지금껏 살아오며 했던 일들, 공부한 것들이 하나도 헛되지 않고 차곡차곡 한 곳에 모였다. 임용고시 때 공부한 시, 소설, 맞춤법이 열 문제 나왔다. 이제는 녹슬어 버린 머리지만 연상법과 두음연결법 등을 동원해서 외운 한국사는 거의 다 맞은 듯하다. 취업특강 강사로 내용 쏟아부어 면접을 준비했다. 전 직장 상사이자 내  인생의 빛이자 귀인인 윤진쌤은, 오래간만에 들른 시청에서 이 채용공고를 기적같이 맞닥뜨렸다. 길고 지루한 빌드업을 거쳐, 쌤의 기가 막힌 마지막 어시스트로 드디어  골든골을 터트렸다. 이제 평생 먹고살 걱정없다.


남편의 심리상담사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자신을 믿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항상 생각하라고.'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해 내고서야 비로소 꿈에 다가설 수 있었다. 제일 좋아하는 도서관에서 제일 좋아하는 책과 함께 하게 되었다.


시엄마도, 절친' 나이에 무슨 공부냐. 쓸데없는 짓 마라.' 핀잔했다. 내심 평생을 공부했는데,  어떤 결과도 으니 이 무슨 쓸데없는 짓인가 싶은 적이 많았다. 그래도 공부의 끈은 놓지 않았. 다 돌아온다.  하나도 헛된 것은 없었다. 꾸준히 준비하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 


노력 없이 환영받을 때가 있다면

이유 없이 외면받을 때도 당연히 있지 않을까.

그런 순간에 나를 만나준, 만나서 자주 어깨를 두드려준 들에게 고맙고 감사하다. 그들이 없었다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좋다. 이제 현실 속으로 들어가 허상에 잠겼던 나를 조각조각 깎아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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