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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Sep 22. 2023

마라톤

결국 두 번째 이빨도 살리지 못했다. 그래봤자 몸을 이루는 물질 중 0.3% 정도가 사라지는 것뿐이다, 고 생각하려 했지만 없어지고 잃어버리고 쇠약해질 일들만 앞으로 남은  같았다. 며칠 전 통화에서  엄마가 너도 우울증인 것 같다고 말했다.


남편은 작년 암에 걸린 후 우울시달렸다. 복귀해 보니 팀동료들은 모두 퇴사했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남편은 다른 팀에 합류했다. 새로운 인간관계,  변화된 몸과 체력, 낮아진 자존감은 무능으로 비춰졌 쏟아지는 비난기어코 그를 쓰러뜨렸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퇴사했다. 또다시 24시간 붙어있으며 지쳐갈 무렵, 생애 첫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갑자기 속력을 높여 달리다가 방지턱에 걸려 넘어지며 무릎과 팔이  다.


절룩이며 걷다 보니 노란 조끼를 걸친 채 물을 건네 자원봉사자분들이 보였다. 얼굴 가득 인정 넘쳐 보이는 에게 다가가니, 상처를 보시고는 가방을 계속 뒤지셨다. 넓은 부위에 물티슈를 펴 붙이고 밴드로 어설프게나마 고정해 주셨다.

"아우~~ 왜 그랬어~~ 마라톤을 왜 했어~~ 아니 그냥 천천히 걸어야지~~ 왜 이렇게 열심히 했어?"

라고 안타까우신  말했다. 일어나 가려는데  공무원으로 추정되는 나이 지긋하신 진행요원분이 달려와 응급차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생애 첫  마라톤에 생애 첫 응급차였다.


무릎을 감싸고 그려 앉아 지나는 이들을 처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개최지인 대부도는, 전날 쏟아진 폭우가 무색하게 햇빛이 내리쬐 따스하게 부는 바람과 드문드문 날아오르는 갈매기로 평화로웠다. 나만 빼고 모두 즐거운 표정으로 걷다가 나를 보고는 걱정하며 한 마디씩 건넸다. 괜찮냐고, 약상자 없냐고들 신경 써주고 물 한 잔 더 건네주셨다. 가슴이 따뜻해졌지만 방해가 되는 것 같아 눈에 띄지 않는 반대편으로 건너갔다.


한참을 오지 않는 응급차를 기다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 오랜 버킷이기도  마라톤을 계기로  자신감 넘치는 새로운 삶을 살겠노라 다짐했다. 내게 마라톤은 건강과 활력약속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과도 같았다. 걷기와 러닝을 병행하며 연습도 나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코스 절반도 못 가서 자빠지고 응급차에 실려가는 이런 꼴이 돼버렸다. 수천 명의 참가자 중 0.1프로쯤의 희박한 확률로.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애어른이 따로 없다.


친절한 자원봉사자분의 말처럼, 너무 열심히 했나 보다. 마라톤까지 와서 걷는 내가 용납이 잘 안 됐다. 대충 하는 것 같았다. 굳이 빨리 뛰다가 방지턱에 턱 하고 걸렸구나. 나는 내내 실패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채찍질하며 버둥버둥 살았구나. 말도 못 할 피곤이 몰려왔다.


드디어 응급차가 왔고 치료를 위해 출발점으로 다시 가야  했다. 삐용 삐용 요란한 소리에 번호표를 달고 도착점을 향해 달리던 사람들이 양 옆으로 붙어 길을 터주었다. 차 안에 있는 나를, 세상 안 됐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어떤 분들은 힘내라는 건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응급의료지원센터에서 나온 분이 상자 안에서 꺼낸 약을 바르고 거즈를 붙여주었다. 병원에 가야 되냐고 물으지혈이 안되거나 내일도 아프면 가보라고 하셨다. 남편은 뜬금없이 내 번호표를 떼 달라더니 완주 메달과 초코파이로 바꿔 왔다. 부끄러웠지만 매달을 목에 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약국에 가 상처를 보여 주며 소독약과 마데카솔, 거즈를 요청했지만 메디폼이 더 나을 거라고 약사분이 했다. 소독을 하면 좋은 성분도 다 긁어내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다. 상처에도 좋은 면이 있구나.

"그래도 매달은 따셨네요~. "

가볍게 던지는 위로에 당황했다. 아차, 메달을 매고 있었지. 절뚝이는 유심히 보시던 지나가는 아주머니도

"마라톤 가서 넘어지셨나 봐요. 그래도 메달 따서 기분은 좋으시겠다."라고 말했다.

건강을 가져다줄 거라 믿었던 마라톤도 신기루처럼 헛된 꿈이었듯, 어떤 것도 그 어느 것 하나 보증할 수 없었다. 다만 자전거의 전철을 밟지 않으면 좋겠다. 어릴 적, 자전거를 배우다가 넘어져 발목을 접질린  자전거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이번엔 실패했다고 멀리 도망가지 말아야지. 계속하는 것이 메달보다 중요하다.


"와이프는 강인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너무 나약하다. 이제 와이프한테 의지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울상을 한 나를 보며 남편이 말했다.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마음 한쪽에선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나는 머리가 좋지 않다. 공부든 일이든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기울일 뿐이다. 나는 강인하지 않다. 없는 힘을 짜내고 있을 뿐이다. 치과 가는 것도 무서워 매번 벌벌 떨고 어깨가 딱딱해질 정도로 겁이 많다. 자살하고 싶다는 남편의 말은 그 무게를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두려움은 모든 것을 쓸어가고 가슴 한쪽을 무너뜨렸다.  건들면 끊어질 것 같은 멘털을 부여잡고 이 길이 맞는지 확인할 겨를 없이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내게만 드리운 것 같은 어둠 속에서 빠져나가는 것만이 중요해 달리고 또 달렸다.


상처에서 계속 열이 난다. 며칠 만에 몸 안의 단백질과 근육이 다 빠져나간 것 같다. 거즈를 힘겹게 갈고 소파에 늘어져 있으니 남편이 짜파게티를 끓여 왔다. 계란프라이 두 개를 얹어서. 천천히 꼭꼭 씹어 넘긴다.

"기깔나게 맛있네."

엄지를 치켜들며 오랜만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회사에서 내쳐진 남편을 나도 하찮고 부담스럽게 바라봤다. 살아있으니 됐다. 잘 먹으니 됐다. 그때보다 낫다. 인생도 마라톤도 장거리니까. 넘어진 김에 우리 잠시 쉬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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