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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Aug 30. 2023

비 오는 날 걷기

도서관에 자원봉사를 갔다. 지난번엔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며 책장 정리만 시켰다. 보기좋게 열을 맞추는 일은 시간이 좀처럼 가지 않았다. 오늘 간 도서관은 달랐다. 웃는 얼굴이 특히 예쁜 사서분은 바로 가르침을 주기 시작했다. 화요일은 바쁜 날이니 자신을 많이 도와줘야 한다면서 청구기호대로 책 꽂는 법, 난리가 난 어린이열람실 책 빠릿빠릿하게 정리하는 법, 상호 대차 도서 찾는 법과 책이 있어야 할 곳에 없을 때 대처법까지 알려주셨다. 잘못 놓인 책을 발견하고 표시를 한 후 여쭤보자 시리즈물을 순서대로 배가하는 업무를 또 맡겨주셨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후딱 갔다. 다양한 일을 배우고 직접 해 본 기쁘고도 보람찬 날이었다.  


집에 와서 오징어 볶음에 허겁지겁 밥을 말아먹고 오랜만에 노곤해진 몸을  뉘어 잠을 청했다. 베개 밑에서 들리는 휴대폰 진동 소리에 눈을 뜨니 중학교 친구 미영이다. 특유의 하이 옥타브로 “자? 자는데 내가 깨운 거야? 전화 끊을까?” 고막을 때리떠들썩함에 이미 잠은 다 다. 살빠졌다고 자랑하며 여전히 혼자 떠들기는 하지만 생기발랄한 목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요즈음 집안일, 아니 남편 일로 우울한 기분이 이어졌다.  친구의 텐션만으로도 이렇게나 기분이 밝아지니 구구절절 말할 필요 없다. 털고 일어나 우비를 챙겨 입고 나갔다.      


공원 트랙은 물을 잔뜩 먹어 미끄러웠다. 오늘은 딱 만 보만 걸어야지. 생각보다 강한 비에, 던 이들도 뿔뿔이 사라졌다. 하늘색 와이셔츠에 짙은 남색 넥타이를 매고 강아지와 산책을 하는 중년분에게 자꾸만 시선이 쏠린다. 오른손의 우산은 자신이 쓰고, 왼손에 우산을 하얀 털북숭이 강아지 위로 받치고 있다. 비 한 방울 맞지 않도록, 아래로 받친 우산에 더 신경을 쓰며 아주 천천히 걸으셨다. 강아지는 목줄 없이 동선을 우산 안에서만 돌며 털 한 가닥 젖지 않고 보송했다.      


그때 위풍당당하게 트랙으로 들어서는 개가 보였다. 우산 씌워주는 집사도 없고 목줄에 매여 있지만 빳빳이 고개를 들고 거침없이 트랙으로 걸어 들어왔다. 기분 탓일까. 사람으로 치면 마치 워킹하는 모델 같다. 비도 쫄딱 맞고 목줄에 매어 있는데도 왜 더 자유로워 보일까?

나 역시 남편이 받쳐주는 우산 아래 젖지 않고 그동안 따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걷는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언젠가 이렇게 다리에 힘이 풀려 흐느적거린 적이 있었는데. 그게 언제였더라.

  



네 살 때였다. 대추나무할머니집에 손녀인 다섯 살짜리 미수 언니가 놀러 왔다. 자기 엄마가 일하는 병원이 근처라며 엄마 보러 같이 가자고 했다. 다 맞벌이로 집에 어른이 없고 가면 맛난 밥을 먹을 수 있겠단 생각에 따라나섰다. 여섯 살 우리 언니와 옆집 언니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인생 최초의 모험을 떠났다. 세 정거장쯤 되는 거리였지만 아직 다리가 영글지 않은 아이들 걸음으론 마라톤완주보다 힘든 도전이었다. 굴다리를 지나 똑바로만 가면 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길을 잘못 것 같다.


한참을 걷다 해가 어스름  질 때쯤 지쳐버린 우리는 처음 와본 동네 길가에 쪼르륵 앉았다. 어린 마음에도 뭐가 단단히 잘 못 됐다 싶어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착하디 착한 인상의 모녀가 우리에게 와서 걱정스런 목소리로 다정하게 물었다.

“얘들아. 엄마는 어딨니? 집이 어디야?”

나는 순간 서러워져서 간신히 참았던 눈물을 왕 하고 터뜨렸다. 언니는 여섯 살밖에 안 된 꼬맹이가 울음을 참으며 의젓하게 설명했다. 천사가 잠깐 내려왔나 싶은 그분들은 우리를 경찰서에 데려다주었고 그 때나 지금이나 똑순이인 언니가 다행히도 집 전화를 고 있었다.   

   

저녁시간인지 경찰관들이 다 같이 모여 짜장면을 시켜 먹는 걸 보는데 그 냄새가 아주 못 견디게 괴로웠다. 종일 먹지 못한 우리는 “맛있겠다. 먹고 싶다.”를 조그맣게 연발하며 짜장면과 문만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씩씩대며 들어온 엄마는 등짝을 때리고 집에 갈 때까지 우리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집에 와서도 엄마는 말없이 빨래판에 방망이만 세게 두드려댔다. 싹싹 빌어야 될 것 같은 느낌이 왔다. 등 뒤에 고 “엄마 죄송해요. 잘못했어요.”라고 했다. 어린 나도 화가 난 게 아니라 걱정이란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살살 눈치를 보다 배를 만지며 애교스럽게 너무 고프다고 하자 엄마는 그제야 표정을 풀고 돌아서서 꼭 안아주었다. 가끔 말씀하신다.

“그때 니들 잃어버렸으면 내가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겄냐.”

     



태어나서 처음 다리가 흐물거리도록 걸었던 기억이다. 지금 상태도 그때와 비슷하다. 비는 오지, 땅은 미끄럽지, 며칠 쉰 탓에 처음처럼 힘들었다. 단 며칠의 우울함이 몇 달동안 차곡차곡 쌓은 기력을 한 방에 날려버린 것 같다. ‘나의 아저씨’에서 이선균이 ‘사는 게 지옥이야. 벌 받을 만큼 다 받아야지.’라고 한 얘기도 생각난다. 나는 무슨 죄를 그리 지었을까.


이십 대 끝자락에 계룡산에 올랐다. 정상 부근에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기르고 도포 자락을 입은 영락없는 계룡산도사가 돗자리를 깔고 계셨다. 총기 가득한 큰 눈으로 관상과 손금을 본 후 말했다.

“초년 복도 없고 중년 복은 더 없어. 그치만 말년 복이 아주 끝내준다. 나중에 사람 여럿 부리면서 살 거야. 내 말  믿어. 앞으로 힘들겠지만 좀만 참아.”

그래, 말년에 편한 게 훨 낫지. 

잃어버린 끝에도 친절한 이들을 만날  있고, 몸이 매여도 영혼만은 끝까지 자유로울 수 있다. 좋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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