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자유시간

by 바다숲

주말 아침이면 바닐라 시럽을 잔뜩 넣은 달달한 아이스커피를 먹는 게 남편의 유일한 낙이었다. 커피는 꿈도 못 꾸는 남편은 맛집에 방문해서 거덜 내는 프로그램을 하루 종일 본다. 먹방의 장점이자 단점은 없던 식욕도 되살린다는 것이다.


흰색 야구모자를 쓰고 산책하는 남편을 보면 멸치대가리에 마요네즈를 묻힌 게 자꾸 연상이 되어 혼자 키득거리곤 한다. 살을 찌워야 하지만, 삼겹살, 치킨, 떡볶이, 닭갈비, 주꾸미, 순대국밥 등 지금 당장은 먹을 수 없는 것들만 먹고 싶어 져서 큰일이다.

남편의 식판

한 입만 달라는 간절한 시선을 받으며 혼자 커피를 마시는 데는 보통 이상의 용기가 필요하다. 원래는 식단을 같이 하기로 마음먹었었다. 이번 기회에 둘 다 잘못된 식습관을 고치고 건강한 집밥으로 정착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막상 의지의 영역이 아닌 거다. 나는 커피 중독자였다. 대학 때 잠을 쫓기 위해 하루 5잔씩 들이키던 자판기 커피부터 시작해서 커피 없는 삶은 상상이 안된다. 또 하루 종일 달고 짜고 맵고 느끼한 먹을거리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뷔페에 가서 닥치는 대로 집어와 코를 박고 열 접시쯤 높게 쌓으며 게걸스럽게 먹는 상상을 천 번쯤 한 것 같다.


어제는 도서관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슬쩍 나가 짬뽕을 사 먹고 왔다. 오늘은 잠깐 본 떡볶이 영상이 뇌리에 꽂혀버렸다. 남편이 잠깐 외출한 사이에, 엄청난 스피드로 큰 팬 하나 가득 떡볶이를 만들어서 허겁지겁 먹었다. 먹자마자 체기가 느껴졌지만, 쉴 새 없이 움직여 설거지하고 문을 열고 환풍기를 켜고 냄새를 뺐다.



아침부터 으슬으슬하고 목이 아프고 열이 났다. 사람을 만나질 않으니 전염병일 가능성도 없고 아플 이유가 없는데, 뭔가 얹혀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 핑계로 나도 앓아누울 수 있겠구나 싶어 기뻤다. 아침밥을 차려주는 대신, 아프다고 어필하면서 차려먹으라고 했다. 오래간만에 알람을 끄고 내리 잠을 잤다. 해방감이 들었다.


저녁이 되니 배는 고픈데 기운이 없어 밥을 차리기 힘들었다. 아무리 아파도 누가 밥 한 끼를 차려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밀었다.

"나 요즘 먹고 싶은 게 엄청 많은데 못 먹어서 스트레스받는 거 같아. 가끔 나 혼자 있게 자유시간을 주면 좋을 것 같아."

"괜찮아. 그냥 먹어."

"그럼 남편도 먹고 싶을 테고, 맘이 편치가 않아."

"와이프가 언제 먹고 싶은지 내가 어떻게 알고 자리를 비켜 주냐고. 그게 말이 돼? 자꾸 그런 얘기하면 나도 스트레스 받는다고. 나 아프잖아~나 환자잖아~알았어. 내가 작은 방에 들어가서 안 나오면 되는 거지?"


그냥, 아주 잠시만 외부로 뻗은 촉수를 거두고 오롯이 혼자이고 싶었다. 이해하라는 말 대신 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오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근황을 주고받던 끝에 남편의 병을 전했다. 대뜸 앞뒤 설명 다 잘라먹고 푸념을 했다.

"있잖아. 너도 알다시피 내가 자유로운 영혼이잖아.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게 너무 힘들다.”

만약 다른 이였다면, 암인데 그 정도는 참아야지. 하고 질책을 했을 것이다.

“자기, 옆에 누가 계속 있는 거 피곤해하잖아. 아이고, 엄청 스트레스받겠다.”

척하면, 척. 단박에 내 마음을 헤아려준다. 나도 힘들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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