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위궤양인줄 알았다.

by 바다숲

숨을 들이마시다가 호흡이 턱하고 막히는 느낌에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꿈을 자주 꾼다. 홍수에 떠내려가고, 벼랑에서 떨어지고, 사람에, 좀비에 쫓기는 그런 악몽을 수도 없이 꿨지만 이런 악몽은 처음이다. 택시를 탔는데 호구 잡혔는지 가까운 길을 빙 돌길래 따져 물으니 내리라고 해서 집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도착해서 배가 너무 고파 냉장고를 열었는데 박카스 한 병과 딱딱한 시루떡 한 덩이가 전부였다. 떡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자 갑자기 번쩍 빛이 나더니 엄청난 굉음과 함께 펑 터져버렸다. 체념하고 박카스를 입에 털어 넣은 후 무심결에 유통기한을 봤는데 5년이 아니라 50년도 더 지나 있다. 마치 빌드업을 하듯 차근차근 악몽의 강도가 세졌다.


넓은 벌판에 홀로 지어진 허름한 집에 살면서 아이가 생기지 않아 고민하고 있었다. 갑자기 집 앞에 아기 원숭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아 진짜 귀엽다 생각하는데 별안간에 원숭이의 얼굴과 몸에서 털이 스르르 다 빠지더니 인간아기가 되었다. 무섭다는 생각도 잠시,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인간이 되었으니 입양해서 키우기로 했다. 그런데 아기가 화만 나면 끔찍할 정도로 큰 소리를 지르면서 짐승처럼 달려드는 것이었다. 무차별 공격을 피하다가 간신히 잠에서 깨어났다.




남편은 요즘 들어 계속 속이 쓰리다고 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한 달 넘게 약국 약만 먹었다. 참을성 많은 남편도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연차를 내고 병원에 갔다. 의사가 혹시 자다가 속이 쓰려서 깬 적 있냐고 물었고 그렇다고 하자 바로 위내시경 검사를 했다. 의사는 위궤양 같다고 하면서도 혹시 모르니 조직검사를 한번 해보자고 했다.


일주일쯤 지난 오늘, 출근하는 길에 열일 다 제쳐두고 병원에 오라는 전화를 받은 남편은 집으로 돌아왔고, 심상찮은 느낌에 나도 얼른 옷을 챙겨 입었다. 남편은 별일 아닌거면 의사 뺨을 한 대 갈겨주겠다며 이상한 호기를 부렸다. 도착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순서가 되었다. 평소엔 오래 기다렸는데 오늘은 1분도 채 안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 진료실에 들어가 긴장하며 의사를 쳐다봤다. 뜸 들이는 순간 잠깐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침묵을 깨고 남편이 조급하게 물었다.


"많이 안 좋나요? 위암이에요?"

"네 위암입니다."

"..."

할 말이 없었다. 머리가 멍했다. 남들은 이럴 때 무슨 말을 하고 뭘 물어볼까. 뭔가 중요하고도 시급한 질문들을 앞다투어 토해내야 할 것 같은데 아무 생각도 안 들고 아무것도 모르겠다.

"큰 병원 가셔서 수술 하셔야 합니다."

"위를 절제하는 건가요?" 어렵게 한마디 입을 뗐다.

"네 수술이니까요." 의사는 뭘 당연한 소릴 하느냐는 듯 답했다.

"얼마나..."

"그건 모르죠. 추가 검사하고 배를 열어봐야 알죠."

"..."

"궁금한 거 있으시면 물어보세요."

둘 다 멍한 채로 있자 의사가 재촉하듯 말했다.

뭘 알아야 되는 건지 모르겠다.

"회복하는데 평균적으로 얼마나 걸리나요?"

"글쎄요. 아직 젊으시니까요. 한 6개월 안에는 회복되지 않을까요?"

희망적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답변이었다.


진료실을 나온 남편은 서둘러 회사에 전화하러 갔다. 아무 정신이 없더라도 회사에 보고부터 하는 게 직장인 마인드다. 병원을 나와서 남편한테 말했다.

"실감이 안 난다. 남편은 실감이 나?"

"전혀 안 나. 그리고 이렇게 건강한데 무슨 암이야? 돌팔이 같아."

"그럼 너무 좋겠지만, 회피해선 안 돼."

철없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답지 않게 뭔가 단호하고 덤덤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큰 병원에 예약전화를 넣었다. 있는 반찬에 밥과 국을 데워 밥상을 차려 먹었다. 둘 다 말이 없었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다. 실감도 안 나는데 억지로 쥐어짜낸 격려가 무의미한 걸 아는 거다. TV소리만 들렸다. 남편이 거실에 걸어진 달력을 힐끔거리며 계속 본다.


"자꾸 달력을 봐?"

"병원 가기 전에 엄마한테 한번 다녀올까 싶어서. 설이기도 하고. 이제 한동안 못 갈 것 같으니까."

어이가 없어 밥숟가락을 내려놓고 소리를 질렀다.

"지금 본인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지 이 마당에 무슨 시댁이야? 장거리운전에 시엄마 또 이상한 소리하면 얼마나 스트레스 받을 거야? 걱정하실까봐 아프다고 말도 못 할 것 아냐? 진짜 이렇게 자기 몸 함부로 대할 거야?"

그랬더니 남편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몇 해 전 영화 ‘신과 함께’에서 극장을 눈물바다로 만든 그 장면, 군에서 억울하게 죽은 둘째 아들이 엄마 꿈에 나타난 장면에서조차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던 남편이 울먹거린다.

"알았어. 집에만 있으면 온갖 생각이 다 들고 너무 우울해질까봐 그랬어. 와이프도 전하고 똑같이 화내지 마. 나 이제 아프니까."

"왜 울어? 울기는? 우울증이야? 우울증 걸리면 수술이고 뭐고 바로 정신병원 집어 넣을 테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알겠어?"

호통을 치며 앞니로 아랫입술을 물며 혼내는 시늉을 했다.

"와이프는 역시 사이코패스였어."

그제야 웃는다.




꿈자리가 그리도 사납더라니, 올해 삼재도 아닌데 정초부터 이게 다 뭔 난리인지 모르겠다. 사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고 악몽속에 있는 것 같다. 깨고 나면 남편이 다가와 '또 개꿈 꿨네.' 하고 싱긋 웃어줄 것 같다. 그냥 이전보다 하늘색이 좀 어두워 보인다. 위암과 위궤양이 내시경검사로는 구분이 어렵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조직검사를 해야 알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우리 이제 맵고 짠 거 조금만 먹고 조심하자.' 하며 마음 푹 놓고 있었으니, 순진한 것도 죄라면 죄다.


멍하니 앉아 TV를 보는데 영화채널에 ‘킹아서-제왕의 검’이 나온다. 마녀로 등장한 여자가 아직 각성하지 못한 주인공을 두고 말한다. 온갖 시련을 줘서 그가 자신의 껍질을 뚫고 나오도록 만들 것이라고. 매트릭스의 키아누리브스도 피 튀기는 전투 속에서 자신이 ‘네오’라는 것을 비로소 믿게 되지 않은가.


희한하게 중요한 순간마다 정신줄을 놓고 될 대로 되 버려라 한 적이 많았다. 사소한 일엔 목숨 걸고 오히려 큰 일 앞에선 꼼짝 없이 나약해지고 한 없이 무기력해졌다. 열심히 하다가도 중요한 시험 직전, 불안에 잠식되어 정신줄과 함께 손을 놓아버렸던 때처럼, 기한도 되지 않은 자취방에서 갑자기 나가달란 말에 아무 소리 못하고 집을 찾아 헤맸던 그 때처럼 말이다. 지금도 도망치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늘 그랬듯 마지막에 또 마지막까지도 회피하고만 싶다.


나는 지금 길 없는 기로에 서 있다. 삶은 누구에게나 초행길이니 끊어진 길을 잇고 걸어가야 하는 것을, 지금껏 제자리만 빙빙 돌았다. 이제 나에서 벗어나 ‘우리’를 생각하며 한 걸음 내딛을 것이다.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강해질 것이다. 이렇게 내뱉고 나니 한결 힘이 나는 것 같다. 물론 전혀 괜찮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