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수술전의 단상
세상에 화낼 일이 하나도 없다
살면서 작은 일로 짜증을 많이 부렸다. 불쾌한 상황, 사람 앞에서 목에 걸린 뜨거운 덩어리를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다 결국 엉뚱한곳에 폭발시키곤 했다. 화풀이 대상은 대부분 만만한 남편이었다.
좋은 기억을 많이 남겨주고 수술받게 하고 싶다. 생각해보니 결혼하고 내 옷 쇼핑에만 미쳐 있었다. 오후에 쇼핑몰에 가서 남편옷을 잔뜩 사고 나오면서 쇼핑백을 양 손에 번쩍 들고 신나는 포즈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 때 갑자기 정문의 경비가 득달같이 달려 와서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며 막아섰다. 주의만 주어도 좋을 텐데 기어이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삭제하는 것을 확인하고 휴지통까지 비우게 했다. 쇼핑의 즐거움이 한 순간 다 날아가고 불쾌함만 남았다. 내가 소비한 상점 앞에서 사진 찍으면 안 된다는 규정은 누가 만들었으며, 고객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내쫓아 버리는 전략은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건지 화가 치밀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 작은 일이다. 그 사람도 자기 일을 하는 것 뿐 아닌가. 울렁대던 마음이 금방 가라앉았다.
최저기온이 영하 10도까지 내려갔다. 아침 운동하는 길 옆 냇가 다리 밑에 커다란 고드름이 매달렸다.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어린 애들처럼 돌을 던져서 고드름 깨기를 제안했다. 나는 못 맞추고 남편이 한 번에 맞춰서 고드름을 떨어뜨리고 좋아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쓰레기를 주우면서 산책하는 일명 ‘줍깅’을 하시는 아주머니였다.
“아니, 지금 뭐하는 거에요? 나는 이렇게 힘들게 쓰레기 줍고 다니는데 누구는 막 뭘 버리고! 알 만한 사람들이 이러면 되겠어요? 지금 뭐 버렸어요?”
너무 크게 화를 내시는 통에 당황했지만, 쓰레기 버린 거 아니고 고드름 맞추려고 돌을 던진 거라고 차분히 설명드렸다. 아주머니는 민망한 듯 웃으시면서 자기가 오해했다고 사과하셨다. 평소 같으면 기분 나빠서 한 동안 씩씩거릴 얘깃거리였다. 하지만 남편을 보고 씩 웃으면서 말했다.
"한 번에 고드름을 맞췄으니 정말 운이 좋다. 분명히 수술도 잘 될 거야."
영화보러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온라인 바로티켓으로 입장한 것을 깜박하고 영수증을 못 챙겨 주차비가 만원도 넘게 나왔다. 남편은 다시 돌아가면 될 것을 당황해서 카드로 얼른 계산하고 빠져나왔다. 역시 평소 같으면 집에 오는 내내 잔소리를 하다 결국 다퉜을 것이다.
"괜찮아. 돈 안 하나도 안 아까워. 영화가 엄청 재밌었잖아."
눈치보던 남편이 그제야 안심을 한다.
세상에 화낼 일이 하나도 없다. 남 기분이나 시선을 평소 많이 신경 쓰는 편인데, 지금은 친구도 시어머니도 다른 가족들 모두 중요하지 않다. 아픈 남편 앞에선 모든 게 심플해진다.
‘인피니트’라는 영화를 봤다. 뻔한 영화였지만, 마지막 대사가 뇌리에 꽂힌다. 몇 백년 동안 전생을 반복해서 사는 주인공이 말한다
"우리가 오늘 하는 일이 내일, 다음 주 그리고 다음 생에 영향을 미칠 것이며, 가능성은 무한하다."
철학자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니체는 ‘지금의 나는 과거의 행동이 모여 필연적으로 일어난 결과이며, 이 생은 영원히 반복된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반복해서 살고 싶지 않다면 이제부터 다르게 살아야 한다.’ 고 말한다. 오늘의 선택은 쉽게 화내던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남편은 내일 입원하고 모레 수술한다. 어쩌면 생은 반복될지도 모르겠다. 늘 쫓기듯 긴장하고 불안해하며 짜증내며 살았다. 가끔 분노를 성장의 연료로 쓰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다른 선택을 한다면 달라진 삶의 모습이 다음 또 그 다음 생에도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