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율을 좋아하지 않는 데는 노력이 필요해.
그는 잘생겼으니까.
(드라마 '환혼' 대사 중)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우스갯소리로 여기 엔지니어 채용조건이 키 작고 못생긴 순서가 아니냐 할 정도로 미남이 드문 곳이었다.
반도체 라인은 먼지에 민감하여 방진복을 착용하고 에어샤워 후에 출입이 가능하다. 모자가 달린 방진복을 입고 장화를 신고 마스크를 쓰면 눈만 빼고 모든 부위는 다 가려진다. 어지간한 사람은 흰색 텔레토비가 되어 초라해지는데, 그만 유독 180이 훌쩍 넘는 키에 피지컬이 방진복을 뚫고 나올 정도로 날렵하고 다부진 몸이었다. 설비 엔지니어였던 그는, 고장이 나면 달려와 목을 조이는 찍찍이를 풀어헤치고 등이 다 젖을 정도로 땀을 흘렸다. 그 모습이 너무 섹시해서 뒤에서 스토커마냥 침을 질질 흘리고 쳐다보았다.
게다가 이미 그의 방진복 벗은 모습을 보았다. CVD는 라인의 최종 공정이라 스크래치 검사까지 마친 칩을 다른 공장으로 넘겨주어야 하는데, 그가 종종 전달책 역할을 했다.
노크소리가 들리고 라인 뒷 문을 열면, 사복을 입은 채 비스듬히 기대 서 있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그가 보였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으면 외까풀진 눈꼬리가 가늘게 내려가며 자연스럽게 눈웃음이 지어졌고, 대화 중에 팔을 들어 내가 서 있던 문 위를 짚고 가까이 다가오기라도 하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가 내 얼굴을 처음 본 건 설비 엔지니어 회식 날이었다. 그 날 아이보리와 빨간색, 초록색이 뒤섞여 들어간 잔체크 무늬 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당시 김희선이 유행시킨 나이아가라(일명 사자머리) 파마를 한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나갔다. 그는 나를 얼른 못 알아봤다. 놀라면서 그 사람이 맞느냐, 이미지가 너무 다르다, 못 알아봤다고 계속 말을 걸어왔다. 내 이름을 부르는 저음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마시지도 않은 술에 흠뻑 취해 꿈결을 걷는 느낌이었다.
음주가무에 진심인 선배들은 여성스러움 따위 개나 줘버리고 엄청난 양의 술을 섞어 마시고, 게임해서 퍼마시고 무식하게 안주를 몰아주었다. 노래방에 가서 또 퍼마시고 미친 듯이 춤추고 놀았다. 얌전을 빼려 했지만, 선배가 '로드파이터'와 '영원'을 눌렀고, 끝무렵에 그는 나를 동성친구처럼 대했다.
로맨스는 끝났다고 생각할 즈음, 그가 라인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 특유의 굵고 낮은 목소리로
“이따가 비 온대요. 우산 꼭 챙겨가요.”라고 말했다.
조금 퉁명스럽게 뭐 그런 일로 전화하냐고 했지만, 통화 내내 심장이 아파서 심장을 움켜쥐고 간신히 말했다.
며칠 후, 내성적인데 뭔지 모를 광기가 있던 동기 한 명을 통근버스에서 마주쳤다. 옆에 앉더니 자기가 라인에서 그를 껴안고 고백을 했으며 그도 받아들여서 사귀기로 했다는 충격적인 얘기를 털어놓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다. 전에도 라인의 작업자 절반은 그와 사귀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사실이 아니더라도 이 천하의 바람둥이 같은 놈을 이제 그만 접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마음과는 달리 억지로 쌀쌀맞게 대하다 보니 일상적인 대화마저 자꾸만 어긋났다.
“휴가 어디로 가요?”라고 내가 물으면 그가,
“바닷가로 가요.” 그럼 또 내가,
“누구랑 가요?”
“...”
“아하. 말 못 하는 거 보니 여자랑 가나 보네요. 바닷가에 혼자 가진 않잖아요.”
“왜 자꾸 비꼬는 거 같죠?”
둘 다 화가 난 채로 대화가 끊겼다. 그렇게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고, 1년 후엔 업무 얘기 외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저만치서 그가 보이면 꺾어서 먼 길로 돌아가거나 천천히 걸은 건, 마스크로 가리지 못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마음을 들킬 것만 같아서였다. 그가 옆에라도 오면 박동 소리가 들릴까 걱정돼 한 발짝 떨어져야 할 정도로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나는 여전히, 아니 점점 더 그가 좋아서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