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의 계절이 지나도록 한 번 준 마음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나오는 꿈을 내리 꾸고서야 차이더라도 고백해야지 싶었다. 그의 동료 엔지니어에게 긴급한 업무 핑계를 대고 간신히 번호를 알아냈다.
“여보세요?” 이럴 수가, 여자가 받았다.
“저... 2라인 CVD 000이라고 하는데요. 혹시 000씨 핸드폰 맞나요?”
“맞는데요. 잠깐 나갔어요. 용건 있으시면 전달해 드릴까요?”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오만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실례지만, 누구세요?”
“00이 누나예요.”
“아~그렇구나~안녕하세요. 직접 말할게요. 감사합니다.”
며칠 후 2차 시도를 했다. 이번엔 다행히 그가 받았다
“여보세요?”
“저 2라인 CVD 000인데요.”
그가 대뜸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어요?”
몰래 캐낸 정황을 들키고 싶지 않아 전화기를 멀찍이 떨어뜨리며 안 들리는 척했다. 그가 몇 차례 더 따져 물었지만, 계속 안 들리는 척을 했다. 급기야 그가 끊으려고 하길래, 다급하게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는데 통화 음질이 너무 안 좋으니 만나서 얘기하자'라고 했다. 뻔한 수작을 부린 것이 못내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로 안도감이 들었다. 전화기를 쥔 손에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어느새 약속한 토요일이 되었다. 친구가 아끼는 브이넥 티와 체크 재킷을 빌려 입고 정성 들여 화장을 했다. 처음 사자머리와 사뭇 다른 중단발의 단정한 생머리여서인지 그가 나를 또 못 알아보고 지나쳤다가 유턴해서 돌아왔다. 나란히 걷다가 보이는 커피숍에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갔다. 은은한 음악과 조명, 우드 인테리어의 그곳엔 우리밖에 없었다.
라인에서의 차갑고 무뚝뚝했던 모습, 자기 번호를 어떻게 알았냐고 엄하게 따지던 것과는 다르게 다정한 목소리, 따스한 눈빛이었다. 그는 얘기하다 몸을 앞으로 숙여 편안하게 테이블에 기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서로 성내지 않고 눈을 맞추는 순간이 소중하고 어색해서 몸이 간질간질했다.
내내 궁금했지만 묻지 못했던, 광기 어린 동기가 그를 껴안고 고백한 얘길 꺼내자 굉장히 억울해하며 사건의 전모를 밝혀주었다. 오해가 풀리면서 마음도 같이 녹아내렸다. 그가 물었다.
"할 말 있다고 그랬죠. 무슨 얘기에요?"
고백할 타이밍이었지만, 맘을 바꿔먹었다.
"음... 할 말이 있었는데, 까먹었어요. 나중에 생각나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씩 웃었다.
이후 개인적인 전화, 문자 한 통 오지 않았다. 라인에서 만나면 그래도 전과 달리 웃으며 인사를 나눴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밖에서 만나고도 아무렇지 않은 그의 태도에 이상하게 화도 나고 전보다 더 조바심이 났다. 이럴 거면 그렇게 꿀 떨어지게 웃지 말았어야지. 동기의 고백을 거절했다고 성의 있게 변명하지 말았어야지. 이 참을 수 없이 복잡 미묘한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마지막 시도를 했다.
“여보세요?”
“저 2라인 CVD...”
그가 내 음성을 듣자마자 얼른 알은체하며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지금 사무실이라 휴게실로 자리를 옮겨 받겠다고 했다. 몹시 떨려서 성대를 잡아야 할 정도로 염소 소리가 났지만 용기가 솟구쳤다.
“저, 할 말 생각났어요.”
“네.”
“00씨. 저 좋아하죠?”
“내가 언제 좋아한다고 했습니까?”
그가 황당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성난 목소리에 잠깐 쫄았지만 그냥 뻔뻔하게 밀어붙였다.
“그럼 저 싫어하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가 말을 흐렸다.
“싫어하는 거 아니면 좋아하는 거 맞네요. 그렇죠? 나도 00씨 좋아해요. ”
그는 말없이 작게 웃었다.
"아니요, 웃음으로 때우시면 안 되고요. 저는 오래 좋아해서 더 못 기다려요. 확답을 주셔야 할 것 같아요."
“... 좋아해요~나도 좋아한다고요.”
그렇게 짝사랑은 첫사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