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종업식 그리고 패션쇼

by 바다숲

이곳에서 나의 장점을 깨달았. 원래의 나는 게으르지만, 군대처럼 강제성 있는 규칙적 생활에 꽤 적응을 잘한다는 것, 그리고 대단히 목표지향적인 인간이라는 것이다.


종업식 한 달 전이었다. 훈련이 종료되면 학교의 졸업식과 비슷한 의미로 종업식을 한다. 의견을 모아 두세 가지 행사를 기획했고, 반장은 각 행사에 맞는 인원을 선발, 배치했다. 누가 봐도 모델같이 늘씬한 애들 두세 명을 반장이 찜해서 '패션쇼' 참가를 지시했고,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선발이었다.

한 명이 모자라니 지원하라고 해서 얼른 손을 번쩍 들었다. 고등학교 때 ‘모델’(김남주 주연) 드라마를 녹화해서 수십 번씩 돌려 봤던 나로선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였다.


분명 손을 든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반장은 못 본 척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다른 이를 찾았다.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고, 나는 맹구처럼 손들기를 반복하며 크게 소리쳤다

“저요. 저요! 반장! 나 하고 싶다고.” 반장이 그제야 당황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모델? 스텝이 아니고?”

다른 아이들도 다 나를 쳐다보고 웃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응. 나 모델할 거야.”

“할 수 있겠어? 알았어. 그럼 한 번 해 봐.”


반장은 어이없지만 딱히 나서는 사람도 없고 하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당밥을 맘껏 먹고 매점을 들락거리며 과자를 입에 물고 잠들었으니, 두 달 만에 생애 첫 정장(지참해 온 유일한 사복)의 단추가 잠기지 않았다. 반장을 비롯해 비웃은 아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는 상상을 하며, 설레는 '모델' 준비를 시작했다.


다이어트만큼은 나름 역사와 자부심이 있었다. 옆 동에 헬스장이 있어 짬이 나면 무조건 직행했다. 처음엔 쭈뼛거렸는데, 러닝머신에서 죽어라 뛰는 한 여자를 보고, 긴장이 싹 사라졌다. 그러나 경쟁심을 불태운 것도 잠시, 쫓아가다간 가랭이가 찢어지고도 남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열정의 소유자였다.



십 분만 뛰어도 숨이 턱까지 차는 나와 달리, 시간은 거뜬히 뛰었다. 한 번은 옆에서 나란히 뛰고 있었는데, 여자가 속도를 계속 올려서 발이 안 보일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속으로 진짜 대단하다~ 감탄하고 있는데 갑자기 굉음이 들려 놀라 쳐다보니, 러닝머신 뒤쪽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마 엄청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튕겨나갔든지 다리에 힘이 풀렸을 것이다. 땀에 절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다 달라붙고 하얗게 질려서 널브러진 여자의 모습이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한 달 후엔 같은 사람인지 헷갈려 몇 번을 다시 쳐다볼 정도로 날씬해졌다.


무튼 매 끼니 밥은 두 숟가락만 뜨고, 지금까지도 최애 과자인 콘칩이 너무 먹고 싶을 때는 두 봉지가 아니라 딱 두 개만 집어먹고 노란 고무줄로 묶어두었다. 목표가 생기니 그동안 음식에 쏟았던 열정을, 참고 운동하는 쪽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렇게 달이 지나 종업식날이 되었다. 석 달간의 직업훈련을 무사히 마친 감회도 남달랐지만, 찡겨서 맞지 않던 정장 품이 넉넉해져 태가 나는 걸 보니 내가 그 어려운 걸 해냈구나 싶었다. 물론 모태 마름 친구들과는 확연한 덩치 차이가 났지만 자신감만큼은 내가 바로 슈퍼모델이었다.


안경을 벗고 렌즈를 꼈다. 최근 '이브'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초록색 눈 화장을 해서 화제가 됐는데, 그보다 진하게 눈두덩 전체를 초록색으로 덮었다. 화장품 가진 게 아예 없었고, 빌린 팔레트에는 난감하게도 초록색과 빨간색 아이섀도우밖에 없었다. 그래서 초록색은 눈에, 빨간색은 입술에 펴 발랐다. 그로테스크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는데, 왠지 맘에 쏙 들었다. 원래 유명한 패션쇼를 보면 저걸 대체 누가 사지 싶은 탈지구적 괴기스러운 것들도 많으니까 말이다. 긴 머리는 양 갈래로 따고 회색과 초록색을 섞은 색감의 긴 바지 정장을 입고 통굽 구두를 신었다.



쿵쾅대는 크고 웅장한 음악이 흐르고, 첫 모델이 나갔다. 몇 초 뒤 걸어 나가는데, 곁눈으로 사람들이 보였다. 시선이 집중된 게 느껴지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표정들이 하나하나 더 선명하게 보였다. 관객석 앞쪽에는 큰 대포 카메라가 우리를 찍고 있었다. 플래시가 팡팡 터지자 순간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잡아먹을 듯한 표정을 지으며, 수없이 연습한 도도한 워킹과 포즈를 했다. 무대 중앙에 서서 손을 허리에 올리며 관객들과 눈을 맞추고 왼쪽 한번, 다시 오른쪽으로 한번 포즈를 하고 턴을 돌아 나오는데, 순간 전기가 오르듯 만족스러운 소름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렸다.

“쟤 누구지? 걔 맞아?” “짱이다.” “저 눈빛 봐. 돌은 것 같아.”



무대 뒤에서 잠깐 눈을 감았다. 몸이 둥~실하고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올라 초록색 눈 화장처럼 드넓은 초록색 들판에 머리를 대고 눕는 것 같았다.

살면서 가장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던 나의 첫 직장, 그 시작점은 아마 그 날의 성공경험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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