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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Jun 02. 2022

시작

요즘엔 막 쓰고 있다. 돈이 아니라 글을 쓰고 있다. 우연히 알게 된 글쓰기 모임 덕분이다.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모임이다 보니 공유된 화면을 통해 퇴고가 이루어진다. 문장과 단어가 즉시 잘려나가고 고쳐지는 모습이, 손질되는 생선처럼 파닥파닥 생생하다. 글쓰기 선생님께서는 퇴고를 하시다가 이건 시냐? 수필이냐? 물으셨다. 잘 모르겠다. 애매하다고 답했다.  

“이건 시도 수필도 뭣도 아니에요. 문학적 요소가 전혀 없잖아요. 이러면 그냥 넋두리, 한풀이가 되는 거고 일기장에나 적는 거죠.”

제목이 ‘내가 살던 동네’였다. 20년 만에 글쓰기라고 나름 강릉 바다까지 가서 온갖 폼을 다 잡고 썼다. 부끄럽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이의 눈을 통해 찬찬히 들여다보니 어줍지 않은 형식파괴에 감정을 주입하려는 허세가 보였다.     



대학교 때, 시 창작 과제가 있었다. 당시 니체에 심취해서 패러디시를 썼다. 가물가물한 기억이지만, ‘술은 무엇입니까? 짜라투스트라는 답했다. 삶은 무엇입니까? 짜라투스트라는 답했다.’ 이런 식으로 진행하는 산문시였다. 한 달이 넘게 걸려 완성했다. 다른 걸 하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달려가 한 글자씩 붙이고 떼고 고치는 식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교수님은 “열심히 한 건 알겠는데, 안타깝게도 재능이 없네요.” 하신 후, 이어서 절친한 언니의 시를 읊어주셨다. 할아버지 심부름으로 막걸리를 받아오다가 목이 말라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다 취해버린 아이의 이야기였다. 보이지 않는 아우성처럼 표현할 수 없는 경탄과 시샘의 깃발이 세차게 휘날렸다. 지금도 실수로 막걸리를 마신 아이의 휘적대는 귀여운 걸음걸이가 선하게 떠오르는 걸 보면, 명징하고 참신하면서도 아랫목 같은 따뜻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었다.     

교수님은 당연하게도 언니에게 ‘언어를 가지고 노는 수준’이라고 극찬을 하셨다. 비교한 사람은 없는데 비교당한 사람은 존재했고, 위축이 됐다. 타고난 재능이라는 높은 '벽'이 느껴졌다. 글쓰기는 그대로 잊혀졌다.    


  

이번 주 글쓰기 과제는 ‘벽’이다. ‘벽’은 내가 노력해도 넘을 수 없었던 수많은 것들을 떠오르게 한다. 글쓰기도 그 중 하나다. 분하고 속상한 마음에 끄적인 것들은 글이 되지 못하고 버려졌다. 누군가는 글쓰기가 치유라는데 내겐 그렇지 못했다. 그저 유치한 일상의 기록이며, 바쁜 삶 속 시간을 죽이는 무의미한 행위였다.




브런치 작가로 선정된지 1주일째다. 선정됐다는 메일을 받은 날, 바람도 따스하고 햇빛은 더 눈부시고 마치 먼 나라로 여행 와 눈앞에 파란 바다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소울푸드인 족발파티를 하고 산책하며 심각하게 작가명을 고민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두려운 건지, 가장 잘하는 미루기 기술을 발휘하면서 첫 글 발행을 못하고 있다. 그동안 엄청난 양의 브런치만 먹어댔다.                                                          

더이상 망설이지 말자. 긴장하지 말자. 치명타를 입더라도 이번에는 쓰러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되뇌어 본다. 맞고 또 일어나 퇴고하면 앞으로 발전하는 길만 남은 거 아닌가? 작가인 앤젤라 데이비스는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고 말했다. 글쓰기뿐 아니라 ‘벽’이었던 모든 것들을 하나씩 눕히고 싶다. 내가 놓은 다리를 건너 더 넓은 세상으로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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