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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Jun 04. 2022

커피

유튜브에 나오는 유명인들은 아침에 눈 뜨자마자 스트레칭 하는 경우가 많다. 동작도 유연하고 우아해 보여 따라하고 싶게 만든다. 또 일상을 보여주는 프로그램 속 혼자 사는 이들은 눈 뜨면 영양제를 챙겨먹기도, 애완견과 반갑게 조우하기도, 멍을 때리기도 한다.


아마 다들 아침 루틴이 있을 것이다. 의식적으로 바꿔야지 하고 애쓰지 않는다면 내 루틴은 이렇다. 예의상 위장에 물 한잔 주고, 커피를 준비한다. 포트에 물을 끓이고, 유리컵에 커피가루를 크게 한 스푼 넣는다. 설탕은 양심껏 뺀다. 뜨거운 물을 조금 넣고 빠르게 휘휘 젓는다. 다 녹인 커피가루에 각 얼음을 잔뜩 붓고 마지막으로 얼음 사이 공간에 우유를 좍 붓는다. 다시 마구 저으면 아이스 카페라떼가 완성된다. 음 그래 바로 이 맛이지. 쌉쌀하면서도 우유의 깊고 고소한 맛이 입안을 맴돌다가 식도로 내려간다. 차가운 그 느낌이 뇌를 깨우고 팔다리에 활력을 주고 쾌변을 약속한다.      



시댁에 가면 이 의식을 하기가 좀 껄끄럽다. 시댁엔 커피가루도 우유도 얼음도 없다. 눈뜨자마자 아침밥을 차려내야 하고 한 칸 화장실에 인원이 많아 여유를 부릴 수 없다. 화장실 코앞이 부엌인 좁디좁은 아파트라 소음도 제법 신경 쓰인다. 하지만 시댁에서 더 간절한 게 카페인이다. 삼시세끼를 절대 거르지 않고 외식을 하면 큰 일 나는 집안이라 돌아서면 밥 차리고 돌아서면 설거지다. 틈만 나면 방을 쓸고 닦아야 한다.      

가끔 상상해본다. 시댁에서 다들 밥상에 모여앉아 아침밥을 먹는데,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혼자 의자에 앉아 아이스 카페라떼를 홀짝홀짝 마시는 거다. 그야말로 미친 신나는 상상이다. 눈칫밥 인생인 나로선 아마 숨이 꼴딱꼴딱하기 직전에나 실행 해 볼까 싶다.



맘만 먹으면 아이스 카페라떼를 집에서 매일 먹을 수 있다니, 정말이지 팔자가 늘어지게 좋아졌다. 이십대 땐 눈뜨면 대기업 믹스커피를 후딱 한 잔 타 먹었다. 당시 믹스커피가 개당 약150원정도였는데 그 돈도 아까워서 오전에 한 개, 오후에 한 개 갯수를 딱 정해놓았다. 그리고 도서관에 도착하면 잽싸게 가방을 놓고 자판기로 달려가 200원짜리 커피 한잔을 뽑아 먹는 호사를 부렸다. 믹스커피와 비슷한 맛인데 도서관 자판기마다 커피와 프림 농도가 제각각이라 먹는 맛이 다르다. 입맛에 맞는 농도 진한 자판기가 있는 도서관을 즐겨갔다. 환경을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커피는 역시 종이컵에 먹어야 제 맛이다.


커피를 마시면 잠들었던 뇌가 깨어나 다시 세팅을 준비한다. 꽉 차있던 뇌를 청소하고 비울 건 비우고 해서 저장 공간을 만들어준다. 눈도 맑아지고 노트필기 할 수 있도록 손목까지 혈액을 빠르게 공급해준다. 마치 요이 땡! 하고 호각을 힘차게 불어주는 것 같다. 지친 몸과 마음에 오늘도 뭔가 할 수 있는 힘을 짜내어 준다.  


      


이제는 바쁠 것도 없고, 백수와 별반 다름없는데도 여전히 커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 후 도서관이든 커피숍이든 이동하면 한잔을 또 시켜 마신다. 요즘엔 자판기가 사라졌다. 예전엔 어디에 처음 가면 자판기 위치부터 확인하곤 했는데, 어느 순간 아무리 찾아도 없고, 물어봐도 “저기 커피숍 있어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기차역이나 터미널 같은 곳에만 간신히 몇 개 남아 추억을 부지하고 있다.


흔한 체인점 커피가격이 변변한 수입 없는 나로선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부동산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요즘 자릿세도 내야하고, 쾌적한 분위기도 함께 사야하니 어쩔 수 없다. 아주 가끔 이 돈을 모으면 재벌은 못 되도 노후대비는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한 잔에 얼마니까 한 달이면 얼마, 10년이면...하고 계산기를 두드려 보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이걸 마셔야 하루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고, 행복한데. 싼 거지, 암 그렇고 말구지.’ 결국 지갑을 꺼낸다.


우리는 조삼모사의 원숭이가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며 어리석다 비웃지만, 실은 동물답지 않게 현명한 것일 수도 있다. 죽을 때 후회하지 않는 인생의 비결은, 오직 당장의 행복을 미루지 않는 데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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