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이 마지막이다. 하고 임용고시에 도전할 때였다. 지금은 난독증이 있나 싶을 만큼 책 몇 장 보기가 힘겹지만, 공부할 때는 소설책 보는게 세상 제일 재밌었다. '엄마를 부탁해'를 이미 한 번 봤던 터라 방심했다. 눈물콧물이 줄줄 흘러서 두루마리 휴지를 왕창 뜯으러 몇번이고 화장실을 왔다 갔다 했다. 벌개진 눈으로 계속 코를 마시고 꺽꺽대니, 어디 초상 났나? 다들 쳐다봤다. 마치 결말이 궁금한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멈출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 수도 눈물을 그칠 수도 없었다.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리듯이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엄마를 돌아보지 못했고, 신경숙 특유의 비감이 잘 드러나 있어 당시 우울하고 늘 늪 속 깊이가라앉아 있는 것 같은 고시생 생활과 어우러져 더 슬펐다.
임용고시에 4년째 도전중이었다.
처음부터 일이 이렇게 될 줄 왜 몰랐을까? 직업선호도 검사를 안해서일까도 생각해봤다. 난 체계적이고 정리에 능한 관습형도, 깊이있게 파고드는 탐구형도 아닌데 도대체 왜 이 방대한 시험에 뛰어든 걸까? 사범대 출신들끼리 50대1이 넘는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는데, 난 왜 그 말의 무게를 알지 못했을까.
지금도 수천, 수만 청춘들의 아까운 시간이 시험에 헐값에 버려지고 있다.
아빠는 애초 대학진학부터 반대를 하신 터라, 당연히 사범대 편입도 성을 내며 반대했지만, 엄마는 나를 믿고 전북 익산에 사는 오랜 친구분께 전화를 넣어 전셋집을 마련해주셨다. 친구분은 발품을 오래 팔아 학교에서 동떨어진 곳에 300만원짜리 귀한 전셋집을 발견하셨고, 학생하고는 계약을 안하겠다는 주인 할머니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약금 봉투를 던지고 오셨다고 한다. 물론 대학가 앞에 월셋방이 많았지만 간신히 등록금만 벌어두었던 터라 해당사항이 없었다.
핸드폰도 정지시키고 외부와 연락을 끊은 보람도 없이 임용고시에 실패했다. 불안이 뇌를전부잠식해버려 저장할공간이 없나 의심될 정도였다. 고단한 현실과 불안한 미래만 있고, 엄마는 안중에 없었다.
아주 가끔 공중전화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이렇게 가끔 전화하라고 밥 잘 챙겨 먹으라고만 하고 핸드폰을 왜 안 살리냐는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잘못된 선택을 한번도 나무라지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