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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 Nov 17. 2019

고양이와 등

범어동에서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온지 햇수로 십 년이 넘었다. 낡은 주택 이층에 방을 얻어 세 가족이 함께 살았는데, 몇 해 전 엄마가 하늘나라로 떠나고 동생마저 구직에 성공해 독립함으로써 혼자 이 넓은 집을 지키게 되었다.


마당에는 큰 감나무 한 그루가 살고 있다. 이층까지 기지개를 뻗은 가지가 부러질 정도니 과실의 수확량이 실로 어마하다. 사년초생이라 하여 추석 어귀에 가장 먼저 맛볼 수 있는 품종이다. 엄마가 단감을 참 맛있게 먹었지. 남의 속도 모르는지 올해도 빨갛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


엄마는 자궁암 진단을 받고 정확히 일 년을 견뎠다.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아주 드물게 의식이 돌아오는 때가 있었다. 게슴츠레 초점 없는 눈을 뜨고 발치에 있는 두 아들에게 말했다.


"남아있는 너희들이 걱정이다."


정작 당신은 사경을 헤매면서도 홀로 남겨질 나와 동생 걱정을 끝까지 놓지 못했다.











엄마의 간절한 바람 덕분일까.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아랫집 아저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아저씨는 공군 중령으로 예편하셨다고 한다. 군복을 입고 가면 후배라며 반색하시니, 장교로 근무하던 나도 덕을 많이 보았다. 주인 내외분 모두 독실한 천주교 신자신데, 요즘은 봉사 활동에 열심이다. 폐지와 빈병을 모아 마당에 널어놓고는, 이번에 얼마를 정산해서 성당 명의(名義)로 불우이웃 돕기에 기부했네 하고 자랑을 한다. 세를 주고 보금자리를 얻는 계약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가족과 같은 포근함이 있다.


지난 추석에는 일층 아주머니께서 부모님 제사에 보태라며 전과 돔배기 등 여러 가지 음식을 가져다주셨다. 남은 명절 음식을 버리는 것이 부담스러워 이층까지 신경 쓰실 필요는 없다고 단단히 말씀드렸지만 소용이 없다. 답례로 회사에서 받은 추석 선물 전부를 나눠드렸다. 받은 것에 비해 드리는 것이 없었기도 하고 혼자 살기에는 필요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마 이쯤 되면 엄마도 걱정 한 스푼 덜어놓지 않았을까.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 참 다행이라며.






며칠 전 일층 아저씨께서 외벽에 등을 달아주셨다. 퇴근이 늦은 내게 가파른 밤 계단 조심하라는 후덕한 내외의 정이다. 저녁에는 담벼락을 공유하는 옆집과 가로수 불빛이 충분히 새어 나와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지만, 달이 뜨지 않는 그믐에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정 모퉁이에 붙은 전구는 움직임을 감지해 스스로 불이 켜지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꺼진다. 문제는 길고양이들이 수시로 내 방 앞을 오간다는 것. 야행성인 고양이들 덕에 이층 현관은 수시로 새벽불을 지폈다. 주범은 하얀 바탕에 갈색 얼룩을 가진 녀석으로, 아마 내 방 주변이 제 영역인 듯하다. 다른 고양이랑 뒹굴며 싸우는 장면을 몇 번 목격했고, 발정기가 왔는지 갸르릉 거리며 약간은 소름 끼치는 소리도 들었다.


창문을 열어두면 하루에도 몇 번씩 염탐하듯 방안을 스윽 훑고 지나가는데, 최근 새끼를 낳아 염탐꾼 수가 부쩍 들었다. 따지고 보면 속이 깊은 녀석이다. 겉으로는 무심한 척 꼭 한마디는 던지고 가니까.


거기 나이 든 총각, 끼니는 챙기는교?
나는 아둥바둥 자알살고 있으니 걱정 말게나.



다행히 나는 잠귀가 어두운 편이라 불빛으로 숙면을 방해받은 적은 없다. 그러나 이른 새벽 대문 밖을 오가는 이들이 놀란 가슴을 부여잡지 않도록 당분간 등을 꺼두기로 했다. 고양이는 밤눈이 밝으니 전혀 문제없을 테지. 다시 켜놓을지는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외로울 때만 잠시 켜 두는 것도 괜찮은 방법같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처럼 느껴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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