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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결방정선생 Oct 23. 2023

게으름에 칭찬 스티커 하나

[초등 교사 일상]




세탁기에서 세탁 종료 알림이 울리지만, 얼마간은 모른체할 수 있다. 운이 좋으면 한참을 잊기도 한다. 안방을 오가다 무심결에 꽉 닫힌 세탁기 문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은근히 반가운 마음까지 든다.

'세탁이 끝난 것을 잊은 채 뭔가에 몰두하고 있었구나.' 

사소하고 급하지 않은 일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 뿌듯하기까지 하다. 어떤 일은 부러 해결하지 않고 잠시나마 저만치 미뤄둘 줄도 알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시작 전에 정리부터 하고 보는_그래서 이미 진이 다 빠져버리는_적어도 나같이 어리석은 '프로정리러'에게는 말이다. 



사람이 게을러지면 오히려 여유가 생기기도 하나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나는 청소는 잘 못하지만 정리 정돈에는 심혈을 기울이는 편이다. 그런 기질 탓에 매번 귀하게 얻은 방학의 여유를 허망하게 흘려보내는 일이 잦았다.  웬일인지 올여름은 게으름이 제때, 제대로 발동해 준 덕분에 금쪽같은 시간이 더 이상 집안일에 침식당하지 않기 시작했다. 책, 장난감, 간식 포장지 등으로 아들 녀석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주던 거실은 이제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대수롭지 않게 가로지를 수 있다. 너저분하게 쌓여있는 빨래통의 옷가지들을 당장 집어 들어 세탁실로 향하지 않더라도 다음 번 외출에는 불편함이 없더라. 설거지며 분리수거 집안 청소까지, 완벽한 시점에 부족함 없이 정리되고 준비되어야만 할 것 같던 일들이 사실은 불필요한 집착이었음을 알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집안일을 잠시 제쳐둔 시간에는 한정 없이 책에 빠져드는 호사를 누린다. 내 시간을 내가 원하는 것에 풍족히 쓰고 있다는 만족감은 스스로를 뿌듯하게 만든다. 이제 막 게을러지기 시작한 나는 더 게을러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다.



지금 당장 해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인 것들을 구분해야지.

사는 데 크게 지장이 없는 것에 나를 밀어 넣어 혹사시키지 말고 조금은 게으르게 쉬엄쉬엄 해나가 보기로 한다. 조금 덜 지치고 조금 더 여유로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든다. 의미를 두고 집중하고자 하는 일에 시간을 더 할애하고 애쓸 수 있기를 희망한다. 없던 시간이 덤으로 주어진 것 같은 든든함으로 나는 벌써부터 시간 부자가 된 것처럼 여유롭기 시작했다. :)   



물론, 물 마시고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슬며시 빨래를 정리해버리거나 밀린 설거지에 조급증을 내는 건 아직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쉽게 찾아오는 변화는 없을 테니 오늘도 조금 더 게을러지기 위해 노력해본다. 그렇게 나날이 게으름이 늘 때마다 칭찬 스티커 하나씩 붙여 주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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