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사 박건호 작곡 이호섭
안녕하세요?
오늘 <가사실종사건> 주인공은 '이자연'입니다.
아래 노래 들으시면서 글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https://youtu.be/IN-uCDcXZMM? si=p86 dvNleBy8 sLGZH
그것이 사랑이라면 이 순간
모든 것 다 줄 수 있어
그것이 거짓 없는 진실이라면
나는 나는 그대 잔 속에서
찰랑찰랑 대는 술이 되리라
- 이자연의 <찰랑찰랑> 가사 중 -
이자연은 1986년 데뷔했습니다. 중학교 때 음반이 나왔고 스무 살경 부산에서 밤무대 활동을 하다가 일본 공연을 가게 되었고 거기서 작곡가 길옥윤 씨를 만납니다. 이후 전국 투어를 시작했고 가수 나훈아를 만나 ‘당신의 의미’로 데뷔하게 됩니다. 그녀의 데뷔곡은 가수 나훈아의 <내 당신>이라는 노래를 개사했습니다.
여성 가수로는 처음으로 대한가수협회장을 지냈고 강남문화재단 이사장도 거쳤습니다. 가수 남진 씨 추천으로 대한가수협회 이사가 되었죠. 그녀의 학구열이 눈에 띕니다. 가수 활동을 하느냐 대학 생활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워 209년부터 수능을 준비해서 건국대 예술문화대학 예술학부에 합격했고요. 이후 언론홍보대학원에서도 석사도 취득하셨네요. 네이버 프로필에는 안보재난관리학과 박사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학문 분야를 종횡무진했네요. 가수 안 하셨으면 무엇을 하셨을까나?
오늘 소개할 노래는 1995년 발표한 곡입니다. 이 노래는 작곡가 이호섭 씨가 이자연 씨의 결혼기념선물로 작곡하여 선물한 노래라고 하네요. 그녀는 늦은 나이인 38세에 만혼을 했죠. 데뷔 이후로 꾸준하게 가수 활동을 해 왔습니다. 최근 가수협회장을 관두면서 최근 낸 앨범이 <무소유>입니다. 이제 해탈하신 건가? 하하하.
자. 본업인 가사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시죠. 제목이 '찰랑찰랑'입니다. 검색을 해 보니 찰랑찰랑은 뜻이 세 개네요. 1) 물이 잔물결을 이루며 자꾸 넘칠 듯 흔들리는 소리나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고 2) 물체가 물결치는 것처럼 자꾸 부드럽게 흔들리는 모양을 나타내는 의태어 3) 작은 방울이나 얇은 쇠붙이가 흔들리거나 부딪쳐 울리는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 의태와와 의성어로 동시에 쓰일 수 있는 말이었네요.
'찰랑찰랑찰랑 대네/ 잔에 담긴 위스키처럼/ 그 모습이 찰랑대네/ 사랑이란 한 잔 술이던가' 부분입니다. 화자는 사랑이 잔에 담겨 찰랑대는 위스키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언뜻 이해가 잘 되지 않죠? 우린 사랑을 하면 잔잔했던 마음이 요동을 치는데요. 바로 이런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네요.
'오- 그대는 나를 취하게 하는 사랑이었고/ 가까이에서 이 마음을 자꾸 흔들었어/ 촉촉이 젖은 눈빛 하나로/ 이 마음을 적셔 주었어' 부분입니다. 위스키는 알코올도수가 40도를 넘나들죠. 그만큼 술 못 먹는 사람은 한 잔만 먹어도 목이 타들어가는 듯하고 쉽게 취합니다. 그만큼 강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위스키 같다고 말했으니 그 위스키를 마신 누군가는 사랑에 취한 것과 일맥상통하겠네요.
'그것이 사랑이라면 이 순간/ 모든 것 다 줄 수 있어/ 그것이 거짓 없는 진실이라면/ 나는 나는 그대 잔 속에서/ 찰랑찰랑 대는 술이 되리라' 부분입니다. 상대의 눈빛에 마음이 요동치는 화자. 그 눈빛에 사랑이 담겼다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겠다 말합니다. 그거에 진정성까지 가미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그런 조건이라면 상대가 마시는 술독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않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 오늘은 오래간만에 글을 적는데 노래를 잘 못 골라 쓸 주제가 척하고 들어오질 않네요. 이론. 하하하. '거짓 없는 진실'에 대해 썰을 풀어보죠. 여러분들은 뭐가 진실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린 자주 사실과 진실을 혼동하곤 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하는, 눈에 보이는 행동이나 말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사람의 속마음을 진실이라고 하죠. 뉴스 같은 곳에서는 사실을 넘어 진실을 찾겠다고도 합니다.
우린 사실을 가지고 많이 말다툼을 벌이죠. 내가 어디서 봤다면서 목에 피대를 세우곤 합니다. 그냥 네이버나 챗지피티에게 물어보면 될 일을 가지고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자신의 옳음을 목소리의 크기로 증명하려 하죠. 이런 경우 제삼자가 나타나 편을 들면 사실의 여부와 상관없이 정리가 되곤 합니다. 사실보다는 쪽수가 그 위세를 떨치게 되죠. 이런 현상은 인간의 심리 때문인데요.
짧은 막대기와 긴 막대기를 보여주고 앞에 9명이 짧은 막대기를 길다고 언급하면 열 번째 사람도 그 답변을 따라가죠. 의심이 들지만 그 분위기를 돌파할 만큼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이 간단한 연구를 봐도 사실은 우리 주변 상황에 따라 쉽게 왜곡되기 쉬운 것임을 알 수 있죠.
우리가 접하는 뉴스는 나름 공신력이 있다고 믿어집니다. 하루하루 벌어진 일들을 나름 객관적으로 소개하죠. 그래서 우리는 뉴스가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곤 합니다. 하지만 뉴스도 충분이 왜곡이 가능하죠. 가짜뉴스처럼 너무 간 경우는 물론이고요. 양면 중에서 하나만을 보여주는 방식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사실은 사실 말하는 사람, 스피커 기준의 사실일 겁니다. 같은 사건 현장을 보고 다 사실을 말하지만 어떻게 바라보느냐, 어디에서 바라보느냐, 언제 바라보기 시작했냐 뭐 이런 다양한 요소들로 인해 한 가지 사건에서 사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죠.
사실을 판단할 때 어느 한쪽의 이야기만을 듣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서 판단해야 하는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특히 인간은 자신의 감정 상태나 습관 등 개별성으로 인해 특정 부분을 유독 잘 보거나 못 보거나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체로 눈에 보이는 것들 위주인데요. 우리의 눈은 가시광선을 위주로만 볼 수 있죠. 박쥐처럼 레이더를 활용하거나 적외선과 자외선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요?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영역이죠.
우린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을 주로 사실이라고 확신하며 삽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뒤집어 보면 그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은 사실이 아닌 것이죠. 사실도 잘 파악하기 힘든 우리가 진실은 또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보통은 자기 객관화 같은 장치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그 괴리를 좁히려고 애를 쓰죠. 하지만 왜곡된 자아 인식은 쉽사리 자기 객관화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굴절된 프리즘으로 아무리 보려고 해도 프리즘 너머의 세상은 늘 왜곡된 형태로만 남아 있기 때문이죠.
제가 최근에 읽었던 몇 개의 책을 보면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한 줄은 '나는 세계와 동일하다'였습니다. 내가 눈을 감으면 세상은 없는 것이고 내가 눈을 뜨고 보는 세상이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인 셈이죠. 그런데 우리가 본다는 것은 보이는 물체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부분일 수 있습니다. 바로 사실이죠. 엄밀히 말하면 부분적 사실입니다. 우리 눈으로는 세상 전체를 담을 수는 없으니까요.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실의 영역이 될 겁니다.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영역이죠.
또 하나의 전제 조건을 달자면 '나는 세계와 동일하다.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는 같은 듯 다르다'입니다. 같은 장소에서 누군가와 볼 수 있는 뷰는 비슷할 겁니다. 하지만 관심 있게 보는 부분은 각자 다르죠. 같은 물리적 시간을 사는 사람이라도 눈만 보고 산 사람과 열대우림에서만 산 사람의 세계는 다릅니다. 모르긴 몰라도 어떤 사실에 대한 믿음 수준도 그만큼 달라질 겁니다.
물론 저 역시 사실을 넘어 진실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보는 창은 누군가의 의지로 만들어진 것이 태반이죠. SNS, TV, 유튜브 등 제작자의 의도가 가미되지 않은 매체를 찾아보고 힘듭니다. 자신이 직접 수고를 들여 해외의 어느 장소를 찾는다고 해도 그 속에서 사는 사람이 느끼는 정서를 느끼긴 쉽지 않을 겁니다. 사실을 접해도 나의 세계로는 그 정서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죠.
이 노래에서 화자는 상대의 촉촉이 젖은 눈빛을 보게 되는데요. 이건 사실일까요? 이미 사랑에 빠졌기에 그리 보인 주관적인 사실은 아니었을까요? 아무튼 그리하여 상대의 진실이 담겨 있다면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하죠. 카사노바일 수도 있고 원나잇을 위해 던진 추파일 수도 있기에 진심을 논하고 있는 듯합니다. 화자는 어떻게 상대의 진심을 확인해서 사랑까지 골인을 했을까요?
사실이나 진실이라는 것이 어딘가에 반드시 있다는 콘셉트를 뒤집어서 보면 사실과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사실이나 진실로 받아들이는 누군가의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사실과 진실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구만큼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망상을 해 보면서 오늘의 브런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PS. 오랜만입니다. 생각이 많아져서 머릿속을 정리하느냐 그동안 <가사실종사건> 브런치 활동을 좀 내려놨네요. 하하하. 쉬는 동안 저를 흔든 몇 권의 책이 있었습니다. 요건 차차 소개해 드립죠. 달력을 한 장 남긴 시점이라 나름의 정리 시간 같은 게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다들 편안하시죠? 하하하. 오늘은 이만^*. See you. Coming s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