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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VAYA May 05. 2024

박명수의 <바보가 바보에게>(feat. 지아)

작사 Minuki, 원태연 작곡 Minuki

안녕하세요?

오늘 <가사실종사건> 주인공은 '박명수'입니다.

아래 노래 들으시면서 글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https://youtu.be/SX9 gkwlnC0 E? si=EvhDwNDwXTLqC399

바보도 사랑합니다

보내주신 이 사람


이제 다시는

울지 않을 겁니다


나 이제 목숨을 걸고

세상 아픔에서 지켜낼게요


이 사람을 사랑합니다


- 박명수의 <바보가 바보에게> 가사 중 -




다시 시작할게

지난 시간을

후회하기보다


왜 이런 바보를

사랑한 거니

슬퍼서 울고 불고


네 마음이

네 사랑이

너무 고마워서라도


사랑하니까

보내준다는

어설픈 말들


그렇게 헤어질 뻔하고

서로 많은 눈물도 흘렸지

나약한 마음 투성이


이제 울지 않을게

널 위해 살아볼게


목숨을 걸어볼게

아픔을 지켜낼게

너의 손을 놓지 않을게


바보가 바보에게




박명수는 1999년 가수로 데뷔했습니다. 가수라기보다는 개그맨 혹은 방송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죠. 1993년 KBS FD로 잠시 일하다가 MBC 개그 콘테스트에서 장려상을 받으며 개그맨 데뷔를 했고요. 그때 동기가 김학도, 표영호, 홍기훈, 서경석, 이윤석이었죠.

현재까지 정규앨범을 4집까지 발매했고요. 싱글도 다수 발표했습니다. 워낙 음악을 좋아해서 '거성 엔터테인먼트'를 만들고 '디지털 엠파이어 레코드'라는 레이블도 보유하고 있을 정도죠. 개그맨 시절부터 이승철 씨의 성대모사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이승철 씨는 탐탁지 않아 했다는 후문입니다. 하하하.

이 노래는 2008년에 싱글 앨범으로 발매되었습니다. 박명수가 자신의 결혼식에서 아내에게 부른 노래로 축가로 많이 불려지곤 합니다. 노래는 참 좋은데 박명수 씨가 그렇게 가창력이 있는 유형은 아니어서 다른 가수들이 커버를 한 곡을 더 듣게 되는 듯합니다. 이석훈, 지아, 산들 씨가 부른 영상이 너튜브에 올라와 있습니다.

박명수 씨는 이 노래 말고도 <무한도전>에서 만든 '냉면'이라는 곡과 '바다의 왕자' 노래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긴 무명시절을 거쳐 현재는 방송계를 종횡무진하고 있죠. 호통개그라는 자신만의 캐릭터도 그 사이 구축했고요. 음악적으로는 '화제성'이 장점이라고 보이네요. 꾸준히 음악 활동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자. 본업인 가사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실까요? 제목이 '바보가 바보에게'죠. 본인도 그리고 본인이 사랑하는 아내도 다 사랑의 바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하면 모두가 바보가 된다고 하는데, 그런 부분을 가사로 쓴 것 같죠?

'너무 걱정하지는 마/ 보란 듯이 살아볼 거야/ 후회는 사치일 뿐이야/ 다시 시작해 볼게/ 나 어제 또 울었어 나 어제 또 슬펐어/ 왜 이런 바보를 사랑한 거니/ 마음이 예뻐서/ 니 사랑이 고마워/ 이젠 니 손을 잡고/ 다시 태어날 거야'로 시작합니다.

다시 시작하려는 각오를 다지고 있죠. 그동안 꽤나 못나게 굴었던 모양입니다. 늘 마음 같지 않은 현실에 눈물은 마를 날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부족함을 한없이 안아준 예쁜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생각하면 지난 시간을 후회하며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말하고 있죠.

2절에서는 '널 위한다는 그 이유로/ 너를 보낼 뻔했어/ 나 그렇게 바보야/ 넌 내 사랑 바보고/ 서로를 많이도/ 울게 했었지/ 니 사랑이 없다면/ 널 만날 수 없다면/ 아마 나는 평생을/ 후회하면 살 거야'가 나옵니다.

서로가 헤어질 뻔한 상황을 그리고 있죠.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지만 서로를 아프게 했고 울게 했던 것 같죠. 화자가 바보라서 좀 더 현명한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배려였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헤어졌더라면 아마도 앞이 캄캄했을 거라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죠.

이 노래의 하이라이트는 '바보도 사랑합니다/ 보내주신 이 사람/ 이제 다시는/ 울지 않을 겁니다/ 나 이제 목숨을 걸고/ 세상 아픔에서 지켜낼게요/ 이 사람을 사랑합니다/.. 널 위해 노력해 볼게/ 널 위해 살아갈게/ 나약한 마음 따윈 모두 버릴게/ 우리의 사랑을 위해/ 너의 손을 잡고/ 놓지 않을게/ 사랑하는 내 사랑 바보야' 부분입니다.

결혼식 주제가답게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가사 전개죠. 상대의 손을 잡고 놓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가사는 '바보도 사랑합니다' 부분이죠. 여기서 바보는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서투른 사람으로 봐야겠죠. 카사노바의 반대 의미 정도로요.

저는 방법을 잘 몰라서 그렇지 그가 가진 사랑에 대한 믿음, 헌신, 순수함 등은 바보 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요즘 같이 서로의 스펙을 안 따지려야 안 따질 수 없는 풍토를 떠올려 보면 이런 바보 같은 사랑이 더욱 그리워지고 가치가 매겨지는 것은 아닐지 싶네요.


음. 오늘은 '바보'에 대해 썰을 좀 풀어봐야겠네요. 바보는 '지능이 부족하여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혹은 '어리석고 멍청하거나 못난 사람을 욕하거나 비난하여 이르는 말'이죠. 제가 오늘 썰을 풀 부분은 후자라고 봐야겠네요.

여러분. '바보와 천재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이런 말 들어보셨죠? 우리는 바보와 천재 사이에 '정상인' 혹은 '정상 범위'라는 것을 상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 범주에 들지 못하면 바보가 되거나 천재가 되는 식이죠. 쉽게 말해서 객관식 시험을 본다고 하면 50점 이하는 바보, 100점 맞으면 천재, 그 사이는 일반적인 수준 이렇게요.

그런데 말이죠. 객관식 시험이 아니라 주관식 시험이면 어떨까요? 이때는 점수제가 아니라 A, B, C, D 혹은 최우, 우수, 보통 뭐 이런 식으로 점수 배정 방식도 바뀌어야겠지요. 아마도 객관식 시험보다는 주관식 시험이  위에서 언급한 범위를 정하는 문제에서 좋게 보면 유연해지고 나쁘게 보면 애매해질 겁니다.

우리 인생은 이런 시험지는 아니죠.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심한 경우는 각자 다른 답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고요. 우리가 누군가를 바보라고 부르는 것은 '답'이 있다는 가정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지점입니다.

고등학교를 나오면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이 '바보'가 되는 형국인 것이죠. 이것이 온당한 것일까요?

다수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답이 될 순 없는 것이죠. 물론 소수라고 해서 정답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보는 사람이 많고 저렇게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구나 이렇게 현상을 파악해야지 거기에 무엇이 더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가치 판단을 개입시키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바보'가 많이 탄생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닐 테죠. 바보가 바보인지도 모르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일 겁니다. 아마도 우리는 혼자 다른 길을 갔을 때 느끼는 외로움, 멸시, 외면 등을 익히 알기 때문에 안전한 일반인 혹은 정상 범위 안에서 삶을 꾸려 가려고 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이런 정상 범위 안에서는 그저 그런 생각이 다수를 이루게 됩니다. 밥을 숟가락이 아니라 주걱으로 먹는 발상이 나오기는 어렵다는 것이겠죠. 물론 효용성 측면에서 보면 주걱으로 먹는 것이 훨씬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바보 같은 생각과 사고가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실마리를 안겨주곤 하죠.

아시다시피 천동설을 믿었던 다수가 있던 시절에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은 바보가 되었죠. 이런 사례는 역사 속에 차고 넘칩니다. 무언가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거나 다수가 옳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여지없이 그것이 바보인데도 정상인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죠.

자신의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무언가를 완성하기 위해 열정을 보이는 사람도 바보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해 자신의 생마저 마감한 사람도 바보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살리겠다고 지하철에 뛰어들어 명을 달리 한 사람도 바보죠.

저는 이런 바보들을 '바라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들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 노래 가사에서도 바보란 의미가 그런 의미로 읽히고요.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정상 범위는 늘 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변화하죠. 우리의 삶도 정상 범위를 넘어서는 바보가 될 때 행복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닐까요? 일탈 같은 것 말이죠.

자신의 기준, 혹은 다수의 기준이 기대어 바보라는 말을 쉽게 꺼내기보다 저 사람이 오히려 진실을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 의심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네요. 인생은 바보가 아니라 바보같이 사는 것이 많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오늘의 브런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PS. 바보는 어리석다는 말과 결을 같이 하죠. 어떤 것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어리석음이라는 단어는 금세 사라집니다. 특정 부분은 전문가라도 관심이 없는 분야에서는 바보가 되기 십상이죠. 시간만 충분히 주어지면 바보 수준을 벗어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자본주의적 삶이 분업화를 기본으로 하다 보니 한쪽은 전문가 포스를 가지고 있고 동시에 다른 쪽은 바보가 되는 경우가 많죠. 생각이 아니라 생활에 있어서는 안 되더라도 이것저것 관심을 가져보고 만져보고 물어보는 일이 필요할 듯싶네요. 즐거운 어린이날 보시와요. See you. Coming Soon-(NO.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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