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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수의 <영원히 내게>

작사/작곡 김정우

by GAVAYA

안녕하세요?

오늘 <가사실종사건> 주인공은 '안상수'입니다.

아래 노래 들으시면서 글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https://youtu.be/mTw92 yxhlUU? si=Qe1 XbhEEWf1 JulNe

지금 내게 무엇도 필요치 않아


나를 대신하던 너였어


이제 나를 나 없는 어둠 속에서


슬프게 할 순 없어


- 안상수의 <영원히 내게> 가사 중 -




안상수는 수와진으로 1987년 데뷔했습니다. 수와진은 3분 사이로 태어난 쌍둥이 형제로 이루어진 듀엣이죠. 형은 안상수, 동생은 안상진입니다.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따서 수와진이라는 팀명이 정해졌습니다. 데뷔 때부터 심장병 어린이 돕기 자선 공연을 펼쳐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둘은 군대를 동반 입대했는데요. 사연이 있습니다. 막내 여동생이 세상을 떠나자 그 충격으로 아버지까지 하늘나라에 가셨죠. 그래서 어머니가 항상 형제간 붙어 있으라는 그리 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문화선전대에서 근무를 했고요. 지금으로 치면 연예 병사입니다.

그러다가 기획자의 눈에 띄고 앨범을 내고 데뷔하게 되죠. 1988년 2집을 발표했습니다. 1집 <새벽아침>에 이어 2집 <파초>도 나름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1989년 동생 안상진이 괴한에게 피습당하며 가수 생활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수와진이라는 이름으로 3집과 4집을 발매하긴 했습니다.

1995년 안상수는 솔로로 전향합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노래는 안상수의 첫 번째 앨범에 실린 타이틀곡입니다. 이 곡으로 그는 KBS 올해의 가수상과 MBC 10대 가수상을 수상합니다. 극적으로 2008년 두 형제는 정규 5집을 발매하기도 했죠.

현재 동생 안상진은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며 신학을 공부해 전도사가 되었다고 하고요. 형 안상수는 여러 지역 축제에서 공연하며 심장병 수술비 모금 행사를 진행 중이라고 하네요. 터프한 목소리가 매력적이죠. 이렇게 오랜 기간 한결같이 봉사활동을 한 사례는 참 보기가 드문 같은데요. 존경스럽습니다.


자 본업인 가사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시죠. 제목이 '영원히 내게'입니다. 제목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화자의 곁에 영원히 있어줬으면 좋겠다 이런 뉘앙스니까요. 저는 가사를 쭉 살펴보면서 한 편의 시가 아닌 시조를 읊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짧지만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겠죠.

'이 넓은 세상에 날 위한 건 너 하나였어/ 밤새워 그렇게도 눈물 흘렸지 어려움 속에' 부분입니다. 오직 한 사람, 이 넓은 세상에서 날 위해주고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주던 너란 사람. 그 사람이 곁을 떠났습니다. 이제 화자는 어디에도 마음을 기댈 곳이 없는 상황. 밤새워 서럽게 울 수 밖엔 없었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체 헤매다가/ 나 또한 볼 수 없는 거릴 걸었어 어딘지 모를' 부분입니다. 넋이 나간 채로 거리를 헤맵니다. 어디에 있는지 몇 시인지 뭐 이런 것을 인지할 정신도 없는 상태로 말이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나라나 부모를 잃은 것 같은 심정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노래의 하이라이트는 '지금 내게 무엇도 필요치 않아/ 나를 대신하던 너였어/ 이제 나를 나 없는 어둠 속에서/ 슬프게 할 순 없어' 부분입니다. 그 사람은 화자에게 대체불가 그 자체였지 않나 싶습니다. 분신 같은 존재였다고 할까요. 사랑하는 이가 사라지니 자신의 존재도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어둠 속에서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 외는 다른 것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죠.

''다시 와 내게로 널 위한 건/ 세상에 나만이 알아/ 나에게 돌아와 이젠 내게 있어 줘/ 영원히 내게' 부분입니다. 다른 어떤 보상으로도 지금의 상실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떠나간 그 사람이 돌아오는 것 밖에는요. 네가 나였고 내가 너였기에 둘은 갈라설 수도 갈라서도 안 되는 관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음. 오늘은 가사 중 '세상에 나만이 알아'에 대해 썰을 좀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원래의 뜻은 아니지만 '천상천하 유아독존'처럼 어깨에 뽕이 팍 하고 들어간 듯한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자신의 치부를 보여주는 사이라면 이런 표현이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노래에서처럼 요.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자신은 못 속인다'는 말이 있죠. 어두운 밤 지나가는 행인이 한 명도 없는 거리에서 빨간불인데도 횡단보도를 유유히 걸어갑니다. 문제가 될 것은 없죠. 그 순간까지도 교통 규칙은 꼭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 반면 너무 융통성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겁니다.

CCTV조차 없는 시골길이었면 어땠을까요? 자신 외에는 그 사실을 아무도 알 턱이 없겠죠. 그럴 때 여러분들은 파란불이 켜질 때를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정도는 괜찮아라고 생각하고 평소에는 신호를 잘 지켰더라도 그냥 무시하고 건너시겠습니까?

잠시 옆길로 새면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님의 강의를 보다가 눈길을 끈 장면이 생각나는데요. 한국인의 특성 중 하나가 자기 판단을 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약속된 규칙이나 법 따위보다 현장에서 자신이 느끼는 상황이나 정황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 돋보인다는 것이죠. 이런 한국인의 특성을 감안하면 위에서 언급한 시골길에서 가장 융통성을 발휘하는 민족은 한국인 되시겠습니다. 역사를 뒤적거려 보면 아마도 꼴찌는 일본과 독일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하하하.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요. 예전에 아나운서 백지연 씨가 유독 자신에게만 엄격하게 살았다고 회고한 바 있는데요. 세상에서 자신의 장점은 물론이고 자신의 흠을 가장 잘 아는 사람도 본인이죠. 세상 사람들을 완벽히 속일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만큼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니까요.

뭐 그래서 정직하게 살자. 혹은 착하게 살자 이런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요. 살다가 생긴 좋은 일이야 주변에 기회가 될 때 말을 하면 되지만 나만의 슬픔이라는 것도 생기죠. 설사 그 이야기를 주변에 했다손 쳤다고 해도 인간의 특성상 제 감정의 일부를 이해할 뿐 전체를 이해할 순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인간이 고독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물리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나만이 아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우리가 내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도 아마 그런 지점을 감싸 안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만이 아는 나 자신과 화해를 하거나 다독거려야 하니까요.

인간관계가 깊어지면서 서로만 알게 되는 장면들이 쌓입니다. 서로를 만나서 어떤 표정을 지었고 어떤 말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당사자만 알게 되죠. 거기다가 마음을 터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서로의 비밀을 공개하는 일도 생길 수 있죠.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방증이죠.

하지만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로 인해 우린 나만 알고 있는 것들 중 일부를 공유하게 됩니다. 누굴 만나도 마찬가지죠. 부모나 자식, 친구 사이에도 그 관계로 인해 나만 알고 있어야 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사랑을 격하게 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여러분들도 자신만이 아는 나라는 게 있으시죠? 아마도 좋은 모습보다는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모습일 텐데요. 물론 저도 있습니다. 하하하. 그것의 존재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나를 자주 꺼내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바로 성찰이고 반성이고 자기 개조의 시작이니까요.

아마도 우리가 사랑할 때 자신만의 아는 나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꺼내놓는 것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고 숲 속에서 외치는 것처럼 그걸 누군가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는군요. 그럼 좀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지는 효과가 있을 테니까요.

나만이 아는 비밀은 잘 감추어야 합니다.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화살이 되어 돌아올 수 있어서죠. 사이가 좋을 때는 모르겠지만 사이가 틀어지면 그걸 빌미로 공격하는 악질들이 즐비합니다. 자신만의 공간에서 풀어헤쳐서 잘 관찰하고 어르고 달랬다가 세상밖으로 나올 때 다시 꽁꽁 싸매고 그래야 하죠. 다른 사람에 대한 아는 비밀도 역시 마찬가지고요.

'만'이라는 의존 명사에서 고독함을 봅니다. 하지만 그 고독에서 한 사람의 고유성이 싹트곤 하죠. 살면서 어차피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라면 잘 관리하는 수밖에요. 세상에 나만 아는 것. 그 오묘함을 넘어 그것이 즐거움이 되기를 꿈꿔 봅니다. 오늘의 브런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PS. 어찌 보면 나만이 아는 영역이 줄어들 때 우린 행복감을 느끼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면적이 늘어날수록 나만의 영역이 줄어들 텐데 우린 그때 가장 기쁨을 느끼죠. 사랑할 때도 그런 경우이고요. 대화가 잘 통하는 상대,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상대와 있을 때도 그렇습니다. 브런치 역시 나만 아는 걸 공유하면서 행복함을 느끼는 공간은 아닐까요? 하하하. 오늘은 이만^*. See you. Coming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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