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사 박진영, 작곡 Dino Fekaris
안녕하세요?
오늘 <가사실종사건> 주인공은 '진주'입니다.
아래 노래 들으시면서 글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https://youtu.be/9-F_l6 pRza8? si=CXkerKDNkmBjWANW
https://youtu.be/FHhZPp08 s74? si=Jrp2 mkHmI3 JKxSWo
난 괜찮아 뒤돌아가
그대의 사랑 같은 사랑 원하지 않아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무리 꿈결 같아도
영원토록 변치 않을 수 없다면
- 진주의 <난 괜찮아> 가사 중 -
진주는 1997년 데뷔했습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가수 활동을 했습니다. 1980년인데 1987년에 음반을 냈습니다. 주진주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본명은 주진입니다. 활동명은 본명을 뒤집어서 진주로 하고 있죠. 초등학교 6학년 때는 국제어린이음악제에 참가해 최우수상을 받았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본선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데뷔한 시점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박진영 씨가 데뷔를 도왔죠. 오늘 소개해 드릴 곡은 글로리아 게어너의 <I will survive>라는 곡을 리메이크한 것입니다. 그녀가 부른 노래 중 가장 유명해진 곡이죠. 1999년 2집에 이어 2001년 3,4집을 발매했습니다.
하지만 성대결절이 오는 바람에 가수 활동을 계속할 순 없었습니다. 그래고 학창 시절에 대한 아쉬움으로 학구열을 불태워서 대학에서 음악과 교수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다 복귀 선언을 했죠. 2017년 가수 20주년을 맞아서입니다. 16년 만에 정규 앨범도 내놓았죠.
현재는 모대학 실용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학과장까지 맡고 있다고 하다고 전해지요. '인사'를 부른 범진이 진주 씨의 친동생이라고 하네요. (이건 몰랐네요). 워낙 폭발적인 성량을 지닌 그녀이기에 확실한 자신의 히트곡을 남기지 못한 것이 맘에 걸리긴 합니다. 그 한을 남동생이 풀어 준 걸까요? 하하하.
자. 본업인 가사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시죠. 제목이 '난 괜찮아'입니다. 1978년 발매한 원곡과 마찬가지로 감당하기 힘든 이별을 겪고 이를 극복하는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원곡 가사를 보시죠.
'처음엔 무서웠지, 너무나 겁이 났어/ 내 곁에 너 없이 절대 살지 못할 거라고 계속 생각했었어/ 네가 나한테 얼마나 잘못했는지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생각해 보니/ 더 강해졌고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 알게 됐어/ 그러자 어디 있다 나타난 건지 네가 돌아왔어/ 집에 들어왔더니 슬퍼 보이는 얼굴을 한 네가 있네/ 저놈의 자물쇠를 바꿨어야 했는데/ 너한테 열쇠는 두고 가라고 했어야 했는데/ 네가 다시 와서 나를 괴롭힐 줄 알았으면 그럴 걸 그랬어/ 어서 나가, 이 집에서 나가/ 그냥 뒤돌아 나가, 더는 네가 반갑지 않으니까/ 나한테 헤어지자고 해서 상처를 준 건 너 아니었나?/ 내가 무너질 줄 알았지? 내가 앓아누워 죽을 줄 알았지?/ 아니, 난 아니야, 난 살 거야/ 나는 사랑하는 법을 아니까 계속 살아갈 거야/ 살아갈 내 인생이 있고 나눠줄 내 사랑이 있으니/ 나는 살 거야, 나는 살아갈 거야' 이런 식입니다. 1절만 본 건데요. 굉장히 서술형이죠.
이번엔 진주의 '난 괜찮아'를 살펴보죠. '니가 떠나면 남겨진 내가/ 눈물로 수없이 많은 밤을 지새울 거라/ 너는 믿고 있겠지만 내게 미안하겠지만/ 난 괜찮아 나를 동정하지는 마' 부분입니다. 서론, 본론 다 생략하고 결론만 탁 던지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원곡이 좀 늘어지는 느낌이 있는 반면 속도감이 유지되는 듯요.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 너의 동정 따위는 내겐 필요치 않아/ 나는 너를 잊을 거야 모두 잊고야 말 거야/ 꼭 할 거야/ 너를 지워버릴 거야' 부분입니다. 독기라도 품은 듯 주변을 맴도는 X를 향한 성토가 이어집니다.
'그냥 그렇게 떠나 돌아보지 마/ 더 이상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는 마/ 누구나 한 번쯤은 다 겪는 이별일 뿐 야/ 난 괜찮아 자꾸만 돌아보지 마' 부분입니다. 단칼에 관계를 베어버릴 듯한 화자이지만 그래도 속마음 어딘가에서는 흔들림이 감지되는 가사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군더더기를 남기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하이라이트는 '난 괜찮아 난 괜찮아/ 그대가 나의 전부일거란 생각은 마/ 아무리 약해 보이고 아무리 어려 보여도/ 난 괜찮아 나는 쓰러지지 않아/ 난 괜찮아/ 뒤돌아가 그대의 사랑 같은 사랑 원하지 않아/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무리 꿈결 같아도/ 영원토록 변치 않을 수 없다면' 부분입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을까요? 하하하. 아닌 거 아는데 마음이 잘 움직이지 않을 때 마치 자신에게 주문을 거는 것 같습니다.
음. 오늘은 가사 중 '누구나 한 번쯤은 다 겪는 이별일 뿐 야'에 대해서 썰을 좀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중심적입니다. 물론 역사에 길이 남을 몇몇 분들은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했다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나마 사랑이라는 묘약의 힘을 빌려 평소에 하지 않던 이타성을 십분 발휘하곤 하죠.
그래서일까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이고 자신이 힘들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자동적으로 느낍니다. 일부 수긍이 가기도 하는데, 내가 죽으면 이 세상도 같이 없어지기 때문이겠죠. 세계 반대편에서는 매일 전쟁의 포화가 울려 퍼지지만 우리는 전혀 그들의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내 손에 박힌 작은 가시가 주는 고통이 타인이 겪는 전쟁의 고통을 뛰어넘죠. 아이러니하죠?
그래서 우리는 배운 사람일수록 간접경험의 힘을 빌려 사회적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계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해야 하고 타인의 고통이 미루어 짐작되는 일을 벌이지 않아야 하는 것이죠. 사이코패스는 타인이 아파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 행위를 멈춰야 한다. 는 생각을 하지 않죠. 극한의 자기 중심성이 만들어낸 인류의 불량품이죠.
극도로 편협한 특수성을 근거로 세계를 대하는 태도는 위험합니다. 자신만이 겪어온 어떤 행위나 준칙이 온 사회에 통용될 거라 생각하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도 우린 자주 그렇게 합니다. 세상의 변화와 흐름과는 상관없이 자신만은 예외일 거라고 단언하죠.
사랑과 이별은 그중에서도 우리의 시야를 극도로 좁히게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사랑을 하면 그 사람만 보이고 그 사람만 생각하게 되죠. 이별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이성이 그 사람뿐이라서 그가 없으면 곧 죽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극도로 편협한 특수성이 똬리를 틀기 딱 좋은 공간이죠.
조금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면 이별한 사람이 나만이 아닌 걸 쉽게 알 수 있죠. 오히려 끝이 자신보다도 더 안 좋은 사람도 적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우린 이별할 때 노래의 위로를 많이 받게 되는데요. 그 노래를 만든 사람들이 이별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과연 그 노래가 이별한 자에게 도달할 수 있었을까요? 수많은 이별 노래가 귀에 들리는 만큼 세상엔 이별한 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려분. 지난해 전 세계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죽었는지 아시나요? 무려 358만 명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을 겁니다. 궁금해서 지난해 연인 간 이별 수를 물어봤더니 챗GPT도 모른답니다. 하하하. 제가 추측건대 1년 사망자보다도 더 많지 않을까 싶은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네. 그만큼 우리 주변엔 이별이 즐비합니다. 우스개 이야기로 오늘과 이별하기 위해 오늘을 살게 되는 아이러니를 가진 게 인간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별 앞에 '누구나 한 번쯤 겪는'이라는 수식어는 아주 적절합니다. 오히려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이별을 겪지 않는 게 더 문제가 될 정도죠.
그런데 우린 이별을 하는 타이밍엔 이 표현을 소화해 내기가 어렵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자기 중심성이 강하게 작용해서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 유일한 이별 뭐 이런 자기만의 이별 서사를 써내려 갑니다. 남들이 보면 사귀다가 헤어진 정도인데 말이죠. 자신만의 특수성에 빠진 누군가가 보편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죠. 다 경험해 보셨죠?
인간의 활동 중 대부분의 일들이 사실 나만 겪는 일이란 게 별로 없습니다. 부모님도 자녀들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비스므레하게 다 겪죠. 친구도 이성도 다 겪습니다. 북한 사람들도 심지어 외국인도 다 겪죠. 먹고사니즘이라는 울타리는 인간인 이상 쉽게 벗어날 수 없고 그 과정에서 겪는 고충과 애로 역시 마찬가지죠. 반대로 나만 겪는 일이라는 게 거의 없다가 더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우리 인생의 묘미는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 속에서 다른 것을 찾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같은 맥락의 말이라도 비유를 어떻게 드느냐에 따라 말의 맛이 달라지는 것처럼요. 누구나 한 번쯤은 죽는 인생에서 과연 우린 스스로에게서 타인과 다른 무엇을 찾아야 하는 걸까요? 오늘의 브런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PS. WoW 이번 주는 하루도 안 거르고 브런치를 썼네요. 예전엔 100일 연속도 쓰고 그랬는데 안 하다 하려니까 좀 힘듭니다. 하하하. 저만 하는 건 아닐 겁니다. 가끔 둘러보면 5년 이상씩 브런치 쓰신 분도 발견하고 놀라니까요. 철학에서 말하는 '차이'라는 용어가 제법 새삼스럽게 느껴집니다. 같은 글이라는 것을 쓰면 어떤 차이를 발견하고 남기고 싶었던 것인지를 되묻게 되네요. 하하하. 오늘은 이만^*. See you. Coming s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