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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와 Mar 19. 2024

20대, 에디터에서 미술 작가 그리고 다시 에디터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몇 주 전 커다란 범고래 한 마리가 노을빛을 등지고 바다에서 튀어 오르는 꿈을 꿨다. 사실 소원을 빌기에는 너무 짧은 별똥별의 속도처럼, 카메라를 들고 있던 나는 범고래의 비행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탓에 그 장관을 찍을 수도 없었다. 옆에서 카메라를 오랫동안 세워두었던 아저씨는 과연 그 고래를 찍었을까.


나는 그렇게 매번 중요한 순간을 놓쳐왔다.

그건 내가 느려서라기보다는 멀리 보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그저 바로 앞의 장면만 보고 카메라를 급하게 들이대왔기 때문일 것이다. 스무 살의 나는 내가 되고 싶은 직업의 이름을 정확하게 모른 채로 어찌어찌 미대에 왔다. 그 직업을 대략 설명하자면 인터넷에서 발행되는 재밌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페이스북에 있던 '페이지'라는 기능으로 여러 문화 예술 콘텐츠를 발행하며 6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계정을 키운 경험이 있는데, 피 말리는 입시 경쟁에서 그 페이지에 올라갈 콘텐츠를 고민하는 시간은 막힌 숨통을 기가 막히게 뚫어주었다. 대학에 입학했더니 이미 내 페이지를 알고 있던 선배들과 동기들은 나를 이른바 '페북 스타'라는 이름으로 대신 불렀다.


비슷한 두 건물이 교묘하게 연결되고 있다.

당시 소셜 미디어의 주류는 이제 막 카카오스토리에서 페이스북으로 넘어간 시기였다. 인스타그램은 다소 비주류, 유튜브는 서양인들이나 보는 동영상 플랫폼으로 인식했다. 소셜 미디어와 관련된 일들에는 아직 이름이 없었다. 겨우 포멀하게 불리는 명칭으로 '인플루언서' 정도였을까? 20대 초반을 지내며 나는 예술과 문화에 깊게 몰두하며 보편적인 취향의 궤도에서 조금씩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과거의 소셜 미디어 계정에는 곰팡이가 피었다. 몇 년이 흐르고 돌아보니 3대 소셜 미디어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는 우리네 삶의 전반을 차지했고 내가 페이지를 운영하며 정보를 나르고 카드 뉴스를 만드는, 그랬던 일들이 개인의 취미를 넘어 직업이 되어있었다. 그 직업을 사람들은 '콘텐츠 에디터'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시기쯤의 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불문하고 쉽게 접근하고 즐길 수 있는 콘텐츠들이 내 성에 차지 않아 다시 과거처럼 내가 직접 콘텐츠를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아마 26살쯤이었다. 빠르고 넓은 콘텐츠보다 다져진 취향대로 느리고 좁은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오만하게도 콘텐츠가 만들어져도 보여줄 플랫폼에 대한 고민은 마땅히 없었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계정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가 진정으로 좋은 콘텐츠를 만든다면 독자들이 자석처럼 달라붙을 것이라는 건방지고 어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균형'이라는 키워드에 대해 몇 달 동안 생각하며 메모장에 짧은 단락을 써 내려가다가, 나무로 된 시소를 만들었다. 서로 균형을 주고받고 하는 기존의 시소가 아니라 양 쪽이 서로의 힘에 집중해 중심을 잡아야만 하는 시소였다. 그 시소를 타는 모습을 찍어 국내에서 가장 큰 청년 미술 공모전이라고 들어왔던 '아시아프'에 출품했다. 출품 당시 경력 칸에는 전시 경력만 기재가 가능했기 때문에 과거의 에디터 경험은 쓸 수가 없었고 그저 작업 설명과 이미지만 성실히 써서 제출했다. 그런데 운이 좋게 공모전에 당선된 후 난 소위 청년 미디어 아티스트가 되어있었다.


당시 만들었던 시소. 균형을 잃으면 쇠구슬이 부딪혀 불쾌한 소리가 난다.


편하고 쉬운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행복해 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렇게 약 3년 정도 작가로 지냈을까. 공모전에 당선되었을 때의 화려한 감정과는 대비되는 묵직한 외로움 같은 것이 마음속에서 알을 까기 시작했다. 적은 관중을 위해 치열한 사유를 전개하는 숭고한 시간이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생활 중 그토록 바라던 전시장에서 전시를 해도, 작업을 통해 내 세계가 확장되는 순간에도 그리 기쁘지 않았다. 과거 소셜 미디어 계정을 운영하며 독자와 쉽고 즐겁게 소통했을 때와 대비되는 감정이었다. 미술 작가나 콘텐츠 에디터나 모두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서로 같은 봉우리를 전혀 다른 시점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렇게 20대의 끝을 달려가던 나는 과거를 반추하며 내가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지를 종합했다. 20대 초반 콘텐츠 에디터로 많은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전해주었던 시간과 20대 중반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노력하며 오로지 나만의 것을 만들기 위해 투자한 시간이 매듭으로 묶인다면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됐다. 정말로 내가 오랜 꿈으로 그려왔던 쉬우면서도 세상에 유효한 콘텐츠를 만드는 길로 가는 첫걸음을 이제야 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과거의 내가 가지지 못했던 '콘텐츠 에디터'라는 이름을 가슴팍에 새겨야겠다는 다짐을 강하게 했다. 내가 새롭게 기획하는 콘텐츠들이 또다시 어떤 현상을, 어떤 파장을 불러오게끔 노력하고 싶다. 사실 나에게 콘텐츠의 주제란 것은 가장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제는 배경으로, 그 배경 앞에 내가 있기에 어떤 주제로 주변을 감싼다 해도 거기서 요리해 나오는 나의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 나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배경과 직장, 친구와 동료 사이에서 나의 존재를 보다 선명하게 확인하게 되는 시기,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겸손하게 가려내고 나의 것을 여러분과 조화롭게 이루어내는 시기.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언젠간 몇 년이 지나고 다시 꿈에 범고래가 튀어 오르는 밤이 온다면 이미 바닷가에 설치된 나의 오래된 카메라들이 그 고래를 선명하게 기록하게 만들 것이다. 돌고래가 아니라 귀엽게 뛰는 날치 떼라고 해도, 매일 지나다니며 하얀 똥을 싸는 흔한 갈매기라고 해도 놓치지 않고 잡아낼 수 있는 준비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숙하게 준비된 콘텐츠 에디터는 세상의 장치 어딘가 중요하게 존재하는 특수 부위 같은 존재라고 믿는다. 꿈과 책과 힘과 벽을 위해 나아가기, 영차 영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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