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고시원에서 원룸으로 한 발짝
2015년 스무 살, 대학 입학 후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로 올라왔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내게 집이란 하나의 국가와도 같다. 나의 6개 국가를 어떻게 꾸려왔는지 기록하기 위해 쓰는 글.
종로 평창동 - 종로 홍지동 - 강북 수유동 - 구로 오류동 - 은평 대조동 - 금천 가산동
종로구 평창동에서 홍지동 - 고시원 (보증금 5만 원/월세 23만 원)
서울 유목의 첫 시작은 학교의 평창동 기숙사였다. 거리순으로 배정받을 수 있었던 기숙사는 경주가 주소지인 나에게 유리한 혜택이었다. 하지만 집안 사정으로 휴학을 한 뒤로 기숙사에 더 이상 살 수 없었고 학교 근처에 있던 홍지동의 한 고시원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고시원은 보증금 5만 원에 월세 20만 원이었는데, 3만 원을 추가하고 창문이 있는 방으로 입주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 좋은 방으로 가게 된 것이 분명한 건데 외풍이 쐐기처럼 방 안을 헤집어서, 그 와중에 보일러도 안 되니 온몸이 하루종일 얼어있었던 것 같다. 외주로 받은 콘텐츠 작성을 하려고 노트북을 열어 책상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다 보면 손이 얼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손가락이 벌벌 떠며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3만 원 더 주고 얻어낸 창문도 학생회 시절 받은 촌스러운 주황색 후드 집업으로 창문을 꽁꽁 가려버렸다. 어째 그 얇은 주황색 후드를 통과한 햇빛은 방에 무드등이라도 켠 것처럼 거짓된 따뜻함으로 방을 채웠다. 그렇게 들어온 빛은 사실 채광이라기 보단 침범이었다.
그리고 6개월, 이곳에서의 생활은 당연하듯 인테리어는 안중에 없고 생존에 집중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을 정도로 힘겨운 겨울을 보냈다. 총무는 고시원 관리를 하지 않는지 매번 화장실은 막혀 있었고, 물론 방음도 되지 않아서 새벽이면 옆 방 현장직 아저씨의 트로트 알람 소리와 밥그릇에 숟가락이 부딪히는 소리가 고스란히 내 귀로 들어와 모닝콜이 되었다.
강북구 수유동 - 고시원 (보증금 5만 원/월세 38만 원)
도저히 홍지동 고시원에서는 더 살아갈 체력이 안 되어서 서울 내의 여러 고시원을 검색했다. 검색해서 나온 수유동의 한 고시원은 '리빙텔'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월세 10만 원 내외만 더 주면 넓은 방에다가, 화장실까지 방 안에 있는 곳에서 지낼 수 있다기에 당장 이사를 결정했다. 고시원의 장점이라면 그런 것이다. 계약 기간에 압박받지 않고 이사할 수 있다.
그리고 며칠 뒤 이불만 양팔에 힘껏 껴안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택시를 타고 수유동에 갔다. 넓게 보이는 방 사진을 미리 보며 입주하면 커튼도 달고 내 마음에 드는 의자도 사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22살의 나는 그게 광각 사진으로 영혼을 끌어모아 넓어 보이게 만든 사진인 걸 전혀 몰랐다. 결국 홍지동 고시원과 별로 차이도 안나는 그저 그런 고시원일 뿐이었고 내가 생각해 둔 어떤 인테리어 소품도 사지 못했다.
이곳에서 2년 남짓의 생활 동안 동대문의 모 쇼핑몰에서 콘텐츠 에디터로 일하며 살았다. 그래도 고시원의 밥, 라면, 김치는 공짜였다. 돈이 되는 일은 아니었으니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대부분 라면이나 삼각 김밥을 먹었고 월급이 들어오는 날이면 퇴근길 정육점에서 삼겹살 200g 정도를 샀다. 하지만 냄새가 문제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는 새벽 시간, 도둑 마냥 공용 부엌에서 문을 꼭 닫고 숨어 구워 먹었다.
구로구 오류동 - 복층 원룸 (500만 원/45만 원)
2018년, 고시원 2년을 정리하고 보증금 500만 원, 월세 40만 원대에 복층 원룸에 입주를 했다. 뮤즈였던 친구의 복층 원룸에 갔을 때 그 친구의 세계가 진하게 느껴졌던 것이 인상적이었던 탓에 내심 꽤나 부러워했었다. 결국 그토록 고대하던 방 같은 방을 얻게 된 나는 여태 모았던 돈을 인테리어에 꽤나 썼던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 이 집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집의 원판, 그러니까 내가 바꿀 수 없는 원룸의 기본적인 색채감과 구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화이트&우드 톤을 좋아하는 나에게 나무로 된 계단과 하얀색 벽지는 인테리어 아이디어가 꿈에서도 나올 정도로 꾸밈의 가능성이 넘쳤다. 그리고 남서향이었기에 노을이 집안을 가득 삼키는 풍경도 큰 장점이었다. 유일한 단점이었다면 창문 밖에서 들리는 전철 소리. 환기라도 할 겸 문을 열면 듣고 있던 음악이 안 들릴 정도였다. 가끔씩은 그게 낭만으로 다가오면서도 다음은 조금 더 외부가 조용한 집을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은 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인테리어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조명이다. 주중에는 퇴근을 하고 오면 대부분의 시간은 밤에 보내는 데다가, 색채 심리학적으로도 주황색, 노란색은 심리적 안정과 따뜻함을 주는 색깔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집은 휴식으로서의 의미가 강할 것이고 저마다 잘 맞는 안정을 찾아주는 퍼스널 조명 컬러를 찾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감각과는 다르게 분명히 누군가는 백열등의 솔직한 하얀빛이 안정을 줄 수도 있을 테고 네온사인의 강렬한 빛이 안락함을 줄지도 모른다.
복도의 천장등은 입주할 때부터 계약 만료 때까지 고장 나 있었다. 그런 덕에 남서쪽의 햇빛이 언제나 공간 속으로 자유롭게 들어왔다. 이곳에서 2021년까지, 약 4년간 생활을 했다. 그동안 매거진에서 일을 하기도 했고 사진작가 겸 기자로 취재를 다니기도 했다. 내 꿈의 새싹이 피어오른 곳이라고 생각하기에 두 번째 고향처럼 여기기도 하는 곳이 되었다.
은평구 대조동 (전세 7500만 원 / 월 이자 약 26만 원)
현장만을 열심히 뛰어다니다 2021년 늦깎이 복학생으로 학교를 다시 다니게 되면서 학교 근처로 방을 다시 구하게 되었다. 당시 금리가 쌌던 덕분에 전세대출을 받아 저렴하게 거주할 수 있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원룸의 모습에 부합한 수준에서 약간 더 좁은, 오류동 집보다는 아주 좁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고시원 정도는 아닌, 그런 방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집으로 계약한 이유도 오류동과 같았다. 내가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인 방의 원판이 좋았다. 남서향으로 햇빛이 잘 들어왔고 화이트톤의 벽과 바닥이었기에 내 손으로 직접 우드톤을 올려 인테리어를 하면 원하는 대로 데코레이션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환하게 들어오는 햇빛은 외부와 내부의 연대감을 준다. 그래서 집에 오래 있더라도 굳이 과장된 외출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합리화가 쉬워진다. 햇빛의 모양을 더 예쁘게 디자인해 보겠다는 생각에 가로형 블라인드를 창문에 설치했다. 햇빛이 가로줄을 만드니 세로줄이 있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세로줄 디자인의 머리맡을 가진 침대를 업어왔다. 특히 원룸 인테리어의 경우 한눈에 전체적인 풍경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캔버스에 하나의 그림을 그린다는 상상을 했다. 주황색과 하얀색 사이 포인트로 준 초록색 식물은 좁고 답답한 공간에 생기를 더해줬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나서는 무인양품에서 디퓨저를 샀다. 제일 잘 나가는 향이 유칼립투스라기에 자기 전 두 방울 정도 떨어뜨려 써보곤 했다. 당시 일본어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였는데, 아무래도 헷갈리는 문법이나 단어를 사진처럼 침대 머리맡에 포스트잇으로 붙여놓았었다. 자기 전과 일어난 후 습관적으로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내용들이 스며들었다. 지금은 일본어로 어느 정도의 회화도 가능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시간이 참 무색하다.
대조동 집은 3년간 살았지만, 사실 그리 집 안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4학년이 되고 졸업전시위원장이 되면서 이래저래 신경 쓸 일들이 많아졌다. 사실 그렇게 맡고 싶었던 자리는 아니었다. 미대 4년간 가장 크고 예민한 행사인 졸업전시의 대표자는 사실상 전시 사업을 운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런 무거운 자리를 하기에 나는 재학 중이라도 학교가 아닌 현장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길 원했다. 하지만 교수님들의 개인적인 부탁이었고 그렇게 생각해 주신 마음이 감사할뿐더러 '그래, 기왕 하는 것 제대로 전시를 준비해 보자'는 생각에 1년을 열심히 봉사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전시를 마친 뒤에는 졸업을 하자마자 좁았던 대조동 집의 계약을 종료했고 부동산 투어가 시작되었다.
가산동 분리형 원룸 (보증금 1000만 원 / 월세 55만 원)
2024년인 올해 초에 이사를 했다.
이번의 집을 찾는 조건은 지하철역과 멀어도 상관없으니 '대조동보다 꽤 넓을 것'이었다.
공간을 활용할 인테리어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넓게 가진 방을 원했다. 할 수만 있다면 투룸을 구하고 싶기도 했지만 서울 집값은 아무래도 나에게 너무 부담스럽고, 그나마 원룸 가격이 싼 지역이라는 금천구로 왔다. 특히 가산디지털단지역은 시가지 발달도 잘 되어있고 1,7호선으로 연결되는 장소의 이점도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 모든 조건이 마음에 들었지만 어두운 톤의 벽지와 복잡한 무늬의 바닥이 영 찝찝하게 남아있었다. 그런데 이 건물이 내년도에 리모델링을 할 예정이라 탈부착형 바닥 시트지만 계약 만료에 잘 정리하면 될 것이라고 이야기가 되었고 직접 방의 치수를 재 셀프 도배와 시트지 공사를 했다. 사실 1년 계약을 한 집이라 이렇게까지 굳이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지만 그럼에도 내게 집은 매우 중요한 요소기 때문에 길게 생각하지 않고 진행했다. 출퇴근 거리가 먼 것은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이곳을 고른 것 또한, 집에서 충전이 가능한 체력의 양이 남들보다 더욱 큰 편이기 때문에 괜찮았다. 벽지를 하고 나니 집이 한결 깨끗하고 가지런해 보였다.
항상 그래왔듯, 이번에도 노란빛을 레일 조명에 달았다. 레일에 총 3개의 조명이 있는데 하나만 주광색으로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전구색으로 교체했다.
컴퓨터 책상에도 조그만 조명을 놓았다. 애인과 한강 피크닉에서 쓸 용도로 샀던 휴대용 조명인데 지금은 내 컴퓨터 책상의 책장 위에 있다. 나는 책장의 쌓인 책들을 보면 기분이 좋다. 왠지 내 과거를 이 책들이 기억하고 보관해 주는 느낌이 든다.
요즘은 혼네의 음악을 많이 듣는다. 사진에 나온 음악은 혼네의 'Warm on a Cold Night'이지만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은 혼네의 'be my side'다. 예전에는 글을 쓸 때 보통 김창완의 노래를 자주 듣곤 했는데 요즘은 브루노 메이저나 혼네의 음악을 맞이 찾게 되었다.
애인의 조카는 나를 '주주삼촌'이라고 부른다. 이름에 '주'가 들어가서 그렇다. 어느 날 애인의 조카가 주주삼촌이라고 내 얼굴을 재활용 종이 위에다가 그려주었고 나는 애인에게 그림을 한국에 가져와 달라 부탁했다.
나와 애인은 한국-일본 국제커플이다. 애인 엄마의 직장에서 교육 자료로 쓴 종이라 일본어가 쓰여 있다. 위아래가 반대로 되어있는 곳에 내 얼굴을 그려주어서 액자도 교육 자료 내용의 반대로 걸게 되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 느낌이 든다. 나는 이런 식으로 그림을 액자에 거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한 장의 종이라도 그것이 액자에 들어간다는 사실 만으로도 작품이 될 때 느껴지는 감정이 특별하다.
우리 집에는 그래서 총 4개의 노란 조명이 있다.
둘은 레일 조명으로, 하나는 컴퓨터 책상에, 마지막 하나는 선반에 있는 이 사진 속의 조명이다.
얼마 전 광명 이케아에서 6,000원으로 매우 싸게 산 플라스틱 조명이다. 가볍고 빛이 부드럽게 퍼져서 가끔 이 조명만 틀어놓아도 따뜻한 분위기에 아늑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옆의 액자는 2022년에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님께 선물로 받은 작품이다. 2017년 독일 프랑크 푸르트에서 열린 전시 MMK를 방문했다가 마음에 드는 점자 작품을 직접 사 오셔서 액자로 만든 것이라고 하셨다. 나를 참 예뻐해 주셨는데, 애정이 있는 제자에게 주는 것이라며 액자를 얼마나 좋은 것으로 사용해 제작한 것인지 참 많이 자랑하셨다. 이 액자를 총 3개 만들었는데 나머지 두 개도 아끼는 제자에게 주셨다고 한다. 아직도 이 작품을 받았던 그 순간의 상황은 생생하게 남아 있는 기쁜 기억이다.
이제 이 집에서 약 1년간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1년 동안 꼭 내가 원하는 곳에서 일하며 이사하게 될 때 두껍게 쌓인 고민과 성과들로 이 집을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벌써부터 다짐하고 있다. 조만간 밥을 편하게 먹을 수 있는 탁자도 사려고 한다. 냉동고에는 다진 고기가, 냉장고와 부엌 찬장에는 조미료가 잔뜩 들어가 있다. 적당하고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일은 사실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이제야 깊게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편지를 들으며 글을 마무리!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