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의 공간
조금 있으면 어김없이 인사발령과 조직개편의 시즌이 돌아옵니다. 운이 좋아 승진한 사람, 할 수 없이 회사를 나간 사람, 역시 할 수 없이 회사에 남은 사람. 많은 사람들의 희비가 엇갈립니다. 인사이동이 끝나면 조직개편이 뒤따릅니다. 승진한 사람은 더 큰 조직을 맡게 되고, 조직이 없어져 새로운 조직을 찾아야 하는 사람도 생기고, 관리를 하다가 관리를 받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조직개편이 끝나면 자리이동이 있습니다. 새로운 조직에 맞게 부서 배치를 하고 팀 배치 그리고 팀원 배치를 합니다. 인사이동이나 조직 개편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자리 배치 또한 작은 전쟁입니다. 조직별로 서로 좋은 층을 차지하기 위해, 같은 층에서도 더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한 신경전이 벌어집니다. 경치가 좋은 자리나 해가 잘 들어오는 자리가 선호되기도 하지만, 직원 입장에서 제일 좋은 자리는 뭐니 뭐니 해도 상사부터 멀리 떨어진 자리입니다. 반면 상사는 자신이 통솔하고 있는 모든 조직원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조직원을 모아두기를 원합니다. 자신은 모든 조직원을 한눈에 볼 수 있지만 조직원은 자신의 자리를 볼 수 없는 그런 자리를 선호합니다. 일종의 '불평등 감시체제'가 발동됩니다.
이러한 자리 배치는 제레미 벤담이 창시한 원형감옥(Pan Opticon)을 떠올리게 합니다. 경험주의자로만 알았던 제레미 벤담은 고등학교 때 배운 것과 달리 무시무시한 사람이었습니다. 영국에서 죄수를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해서 만든 원형감옥은 원형으로 만든 감옥 중앙에 감시탑을 세워서 감시자가 효율적으로 죄수들을 볼 수 있도록 만든 시스템입니다. 중앙의 감시탑은 늘 어둡게 하고 죄수들의 방은 밝게 만들어서 감시자는 죄수를 볼 수 있지만 죄수가 감시자를 볼 수 없도록 했다고 합니다. 죄수들은 자신이 늘 감시받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며 결국 죄수들은 규율과 감시를 자기 스스로 내면화시켜 스스로를 억제합니다. 원형감옥에서는 이러한 ‘가시성의 상태’가 바로 함정입니다. 원형감옥에서 수감자는 중앙의 감시자를 볼 수가 없습니다. 수감자에게는 권력의 자동적인 기능을 보장해주는 가시성의 의식적이고 지속적인 상태가 만들어집니다. 감시 작용의 중단이 있더라도 그 효과는 계속되도록 하고, 권력의 완벽한 상태는 권력행사의 현실성이 점차 약화되도록 하고 건축의 장치는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상관없이 권력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기계장치가 되도록 합니다.
벤담은 권력이 원형감옥처럼 가시적이고 확인할 수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합니다. 권력은 근원은 어떤 인격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 표면, 빛, 시선 등의 어떤 계산된 분배 속에, 그리고 내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개개인 등이 묶여 있는 관계를 만들어 내는 그러한 기계장치 속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미셸 푸코는 원형감옥(Pan Opticon)을 생각해낸 제레미 벤담을 칸트나 해결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면서 감옥과 권력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파헤쳤습니다.
미셸 푸코가 말한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통한 개인에 대한 규율 장치는 대학교 경영학 첫 수업에서 배운 테일러 과학적 경영기법을 떠올리게 합니다. 헨리 포드가 처음 시도했다는 컨베이어식 공장은 다름 아닌 노동자 공간의 철저한 지배였습니다.
회사는 원형감옥의 가시적이고 확인할 수 없는 감시체제를 구축하고 강조합니다. 비록 아무도 나의 출퇴근 기록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더라도, 회사의 출입증 시스템은 우리에게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에 대한 압박을 가합니다. 회사는 내가 서핑하는 웹사이트 목록을 마음만 먹으면 알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회사에서 주고받는 이메일, 메신저 내용을 언제든지 회사가 볼 수 있다는 암시를 줍니다. 실제로 회사에서 보고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회사 곳곳에 설치된 CCTV는 내가 하루 종일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동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현대 정보화 시대의 회사는 갈수록 원형감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대부분 회사에서 사무실의 구조도 원형감옥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상사는 자신의 모든 부서원들이 보이는 자리에 위치해있고, 직원들은 상사가 항상 자기를 보고 있다고 혹은 언제든지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통제합니다. 웹서핑도 덜하게 되고 스마트 폰도 덜 보고 주식사이트도 덜 들어가게 됩니다. 옆에서 보이지 않는 모니터 커버를 씌워서 감시의 눈길을 피해보려고 하지만 일시 방편일 뿐입니다. 상사가 언제 자신의 등 뒤에서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죠.
회사라는 감옥
‘감옥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장치’ 일뿐이라고 미셸 푸코는 말했습니다. 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는 우리에게 미셸 푸코의 말은 충격적입니다. 좀 과한 표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틀린 말이 아닙니다.
회사는 감옥일까요, 아닐까요? 회사가 감옥이 아니라면 저는 언제든지 회사에서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회사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먹고 살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 구조적으로 자영업을 하거나 프리랜서를 해서 4인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낮습니다. 미셸 푸코는 그 지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구조적으로 저는 회사를 나올 수 없으므로 저에게 회사는 감옥입니다.
회사는 나에게 변화하면 형을 줄여주겠다는 이데올로기를 심어주고 있는 듯합니다. 원하는 대로 반항하지 않고 규율에 맞게 일을 하면 감형해주겠다는 간수 같습니다. 그 간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회사에 적응해서 회사가 원하는 규율에 맞춰서 회사가 원하는 인재가 되어서 회사가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하면 회사에 좀 더 오래 다니게 해 줄게.”
하지만 아무도 회사를 감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감옥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회사도 현실의 감옥과 같이 권력화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자아실현에 성공한 한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옥이라는 공간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서 많은 책을 읽고 성공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주로 소위 ‘좌파’라고 일컬어지는 분들 중에 그런 분들이 많다. 유시민은 감옥 안에서 ‘항소이유서’를 써서 자신이 글쓰기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책을 읽고 싶어 다시 감옥에 가고 싶다는 말도 했습니다. 신영복은 감옥에서 서예 연습을 열심히 해서 신영복체라는 것을 개발했고 옥중서신을 책으로 엮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명저를 남겼습니다. 인도의 독립운동가 ‘자와할랄 네루’는 딸의 교육을 위해 ‘세계사 편력’을 써서 딸의 원격 교육에도 성공하고 불후의 베스트셀러를 남겼습니다.
회사가 감옥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감옥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합시다. 여러분과 저는 겁 많은 샐러리맨임을 인정합시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실제 감옥에서 유익한(?) 시간을 보내신 분들이 있듯이 우리는 어떻게 감옥 같은 회사에서 우리의 실존을 채울 수 있을까요?
슈필라움과 자기만의 방
김정운 작가는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에서 슈필라움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보잘것없이 작은 공간이라도 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한 공간, 하루 종일 혼자 있어도 전혀 지겹지 않은 공간, 온갖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그런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내 ‘슈필라움’이다.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놀이(Spiel)와 공간(Raum)이 합쳐진 이 단어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물리적 공간’은 물론 ‘심리적 여유’까지도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재미있게도 이 독일어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단어가 우리말에는 없다고 김정운 교수는 말합니다. 개념이 없다면 그 개념에 해당하는 현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감시자의 시선을 등 뒤에서 느끼며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회에 이런 개념이 있을 리가 없죠. 현상이 없어서 단어가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공간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버지니아 울프'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그녀도 공간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습니다. 그녀의 에세이 ‘자기만의 방’은 페미니스트들 뿐 아니라 모든 창작가들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한 가지 의견, 즉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슈필라움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것은 작가들만이 아닙니다.
공간을 경쟁력으로...
갈수록 기업들은 개인의 사고하는 능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3차 산업혁명이든 4차 산업혁명이든 모든 것의 출발점은 ‘생각하는 개인’입니다. 사람을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만든 사람들은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역설을 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적 비즈니스 모델을 깨뜨리는 디커플러들과, 이러한 디커플러들을 방어해야 하는 기존 업체들 모두 ‘생각하는 개인’이 필요합니다. ‘90년대생이 온다’에서 살펴보았듯이 기계처럼 일 하는 사람은 갈수록 없어지고 있고 자기 충족감을 요구하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감시체제의 회사는 매력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고 인재들을 끌어들이기 힘들어질 것입니다.
개인들 입장에서도 생각하지 못하는 인간은 갈수록 도태될 것입니다. 생각하는 인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지성 작가는 ‘에이트’에서 윤기윤 교수의 ‘미래 사회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인간의 99.9%가 프레카리아트(불안정한 노동계급)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전통 농경시대의 근면하기만 하고 생각할 수 없는 인간들은 모두 AI에 대체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회사도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이 필요하고 개인도 그러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기업과 개인의 니즈에 '공간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현대의 샐러리맨에게는 사색할 공간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가장 창의적으로 되는 순간이 멍 때리는 순간이라고 합니다. 온갖 정보가 빛의 속도로 프로세싱되는 현대인의 뇌는 멍 때릴 공간이 없습니다. 멍 때리기가 힘들어 멍 때리기 대회가 열릴 정도입니다. 회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샐러리맨들이 멍 때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는지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김정운 교수 말대로 ‘삶이란 지극히 구체적인 공간 경험들의 앙상블’ 일지 모릅니다. 하루의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회사 사무실 공간에서 감시만 받고 있다면 행복은 고사하고 생산성의 증가는 기대하기 힘들 것입니다. 많은 벤처기업들이 회사에 애완견도 가져오게 하고 소파 같은 공간에서도 일 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실리콘 밸리 기업들이 기업 캠퍼스에 그렇게 많은 투자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업이 창의적인 직원을 원한다면 답은 하나입니다. 원형 감독(Pan Opticon)을 부수고 슈필라움을 제공해주어야 합니다. 그 많은 직원들에게 그렇게 넓은 공간을 어떻게 제공해주느냐는 반발이 제일 먼저 나올 것입니다. 공간 비용 때문에 회사가 망하지 않겠지만 창의성 없는 인재들이 난무한 회사는 언제라도 망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공간 비용을 과도하게 지불하더라도 회사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막힌 아이디어 한 가지만 나오면 됩니다. 저성장의 늪에 빠져있고 미국과 중국의 플랫폼 기업들에게 무차별하게 당하고 있는 한국기업의 상황을 고려하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인재는 이제 선택이 아니고 필수입니다.
비용과 제반 상황들 때문에 직원들만의 공간을 마련해주지 못한다면 자리에서 자율성이라도 확보해줘야 합니다. 자신의 책상을 어떻게 꾸미든 뭐라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작은 공간이 그들의 슈필라움이 되게 해야 합니다. 본인의 자리에서 무엇을 하든 간섭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리에서 PC가 아니라 스마트폰을 들여다봐도 일 안 하고 딴짓한다고 나무라는 상사들이 많습니다. 자리에서 멍 때리고 있는 듯한 직원을 나무라지 맙시다. 노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생각하는 시간을 지정해 주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빌 게이츠만 생각주간을 가지라는 법은 없습니다. 책을 잔뜩 싸들고 펜션이나 카페에 가서 마음껏 상상하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줘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의 결과물을 공유하게 해야 합니다.
스타벅스 같은 사무공간
공간을 사업을 만든 우리 모두가 아는 회사가 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자주 못 가지만 바로 스타벅스입니다. 스타벅스의 성공은 강력한 배전에 따른 강한 커피를 통한 ‘커피의 재정의’였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간의 재정의’였습니다. 하워드 슐츠는 사업 초기에 스타벅스를 커피를 마실 수도 있고 원두를 살 수도 있는 커피 소매점으로 정의하여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했고, 점차 커피를 파는 공간이 아닌 문화를 파는 공간으로 스타벅스의 공간을 재정의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타벅스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는 등 문화 활동을 합니다. 봉준호 감독도 시나리오 작업을 주로 카페에서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타벅스는 IT기업은 아니지만 IT문화가 가져온 수혜자입니다.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회사나 집이 아닌) 제3의 공간이 필요한 현대인의 니즈를 스타벅스는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타벅스가 깨달은 것을 기업들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일하는 공간이 구성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제 AI는 IT시대에 익숙해져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두뇌 공간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두뇌 공간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우리는 집에서, 직장에서 혹은 제3의 공간에서 인간의 ‘물리적’ 공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상사의 감시도 없고 CCTV도 없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감시하는 자체 감시 시스템도 없는 오롯이 우리의 정신과 생각과 창의성만이 머무는 공간 말입니다. ‘어떤 공간에 있는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