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지 않은 죄

생각하는 샐러리맨을 위하여

by 가우

복지부동의 유혹


직장인들은 눈치를 많이 보면서 살아갑니다. 능력과 실력 위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직장에서 성공 여부가 인간관계에 의해서 특히 상사와의 인간관계에서 상당 부분 결정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상사와 쓸데없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상책이고 위에서 시키면 토 달지 말고 즉시 실행해야 한다는 관념이 직장인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독심술을 발휘해서 상사가 지시하기 전에 무엇을 지시할지 먼저 파악하고 미리 알아서 일을 해야 성공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관계에 집착하는 샐러리맨은 위에서 지시한 것은 아무런 판단 없이 바로 실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 회사 조직에서 위에서 지시했다는 이유만으로 범죄 행위에 가담하기도 하고, 협력사만 돈을 벌고 회사는 손해를 보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하고, 비윤리적인 상사의 행동에 눈을 감기도 합니다. 또한 상사의 지시사항을 수행하고 자신이 한 일을 상사에게 보고하면 자신은 면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다칠 위험이 있으면 상사에게 빨리 보고해서 책임을 전가합니다.


조직이라는 것이 상명하복의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변명을 하지만 뭔가 찜찜합니다. 이러한 관행은 회사에서 샐러리맨의 윤리와 관련되어 있지만, 회사에서 한 개인으로서 자존감을 확보하는 데에도 장애요소로 작용을 합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우리는 괜찮은 것일까요?


세 가지 무능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에 앞장선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보고서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아이히만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오스트리아를 거처 이탈리아로 넘어갔고 이탈리아에서 한 신부의 도움을 얻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도망쳤습니다. '리하르트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아이히만은 자동차 세일즈맨 등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1961년에 체포되어 전범으로서 이스라엘 예루살렘 법정에 서게 됩니다. 한나 아렌트는 전 재판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이히만에 대한 분석 작업을 하였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3가지 분야에서 무능했다고 말했습니다. ‘말하기의 무능’, ‘생각의 무능’, ‘판단의 무능’이 그것입니다. 물론 세 가지 무능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이히만은 평범한 사람이었고 그의 범죄는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그녀의 분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정신병자였을까요? 한나 아렌트의 보고서에 의하면 6명의 정신과 의사가 그가 정상이라고 진단했다고 합니다. 그는 유대인에 대한 광적인 증오나 열광적인 반유대주의나 세뇌교육의 희생양이었을까요? 아이히만의 친한 친구 중에 친 유대적 사고를 가진 친구도 있었고 양어머니의 사촌이 유대인 여자와 결혼했는데 그 여자의 주선으로 유대인 회사에서 일한 적도 있고 전쟁 중에 유대인 여자 정부를 둔 적도 있었습니다. 그가 유대인을 딱히 증오할만한 이유도 없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앞서 말한 아이히만의 세 가지 무능 즉, ‘말하기의 무능’, ‘생각의 무능’, ‘판단의 무능’이 평범한 아이히만이 그러한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언급하면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서 주장했습니다. 즉 말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고,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라도 언제든지 악을 저지를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마이클 센델’ 교수는 한나 아렌트가 보편주의에 빠졌다고 비판했지만 저는 한나 아렌트의 말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샐러리맨은 아이히만처럼 ‘말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고’, ‘판단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말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고, 판단하지 못하는 샐러리맨


일단 넘어가기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장기적 미래에 대한 회피 성향(Discounting the Future)이 있다고 합니다. 즉 미래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미래에 합리적으로 보이더라도 비합리적인 현재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보이는 비효율성, 비이성, 비합리성을 못 본 채 하고 미래로 넘기는 경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말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리스크를 미래로 전가하는 것입니다.

‘올해 일단 평가를 잘 받아야 하니까 일단 시키는 대로 하자.’

‘내년에 어느 부서에서 근무할지 모르는데 이번만 넘어가면 괜찮겠지?’,

이런 생각 한 번쯤 해보지 않으셨나요?


평가의 위험


직장에서는 누구나 평가를 받습니다. 요즘에는 내 상사가 나의 업무 성과를 평가할 뿐 아니라 ‘수평 평가’ 혹은 ‘상향 평가’라는 이름으로 동료나 부하직원까지 시시각각 나를 판단하며 정의 내립니다. 우리의 이미지는 위험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말수를 줄입니다. 내가 입바른 소리를 하면 나에게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로 나를 위로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가 보여준 내부고발자에 대한 태도도 이런 점을 확인시켜줍니다. 고위 공직자의 비서와 대기업의 사내 변호사의 양심적 폭로를 조직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고 정치적 언어로 난도질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조직의 효율성도 떨어뜨립니다.


<두려움 없는 조직>의 저자 ‘에이미 에드먼슨’ 하버드대 교수는 조직 내 두려움이 구성원의 학습능력과 협동력을 저하시킬 뿐 아니라 개인의 사고력, 통찰력, 문제 해결 능력까지 저하시킨다고 주장하면서 ‘두려움 없는 조직’을 만들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뇌과학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두려움이 구성원의 학습과 협동력을 저하시킨다고 증명해왔습니다. ‘파블로의 개’로도 무명한 20세가 초 행동과학자 '이반 파블로프'는 1924년 레닌그라드 홍수 이후 자신의 연구실에서 기르던 개 수십 마리의 학습 능력이 현저하게 저하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중략)
두려움은 또한 분석적인 사고능력과 창의적 통찰력, 문제 해결 능력까지 저하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두려움에 휩싸이면 우리가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구성원의 학습 참여도(정보를 공유하고 도움을 요청하며 각종 실험을 진행하는 등의 적극성)는 두려움에서 얼마나 벗어나느냐에 따라 결정되며, 이는 직원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뇌과학에서 이미 증명된 셈이다.
<두려움 없는 조직> 46-47


학살의 언어도 은유되고 반복되면 무감각해진다


나치스는 유대인을 학살하는 과정에서 그들만의 은유적인 ‘언어 규칙’을 만들어서 사용하였습니다. 학살을 처방하는 암호는 ‘최종 해결책’, ‘소개’, ‘특별 취급’ 등이었고, 이송은 ‘재정착’, ‘동부지역 노동’ 등으로 불리었습니다. 이러한 은유적인 언어 규칙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아이히만을 포함한 나치스는 사람을 죽인다는 현실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부른다는 이유로 상사를 '꼰대’라고 부르는 순간 모든 상사는 나쁜 놈, 아니면 이상한 놈이 되고 죄의식은 사라집니다. 나쁜 놈, 혹은 이상한 놈과 대화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직장인들이 회식장소에서 담배 피우는 장소에서 모여 흔히 하는 회사와 상사들에 대한 뒷담화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불만을 이야기하다가 헤어질 때 하는 말은 항상 같습니다.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냐?’

'위에서 하라면 하는 거지.’

'회사와 상사에게 복종하는 것이 직장인의 윤리지.’


무심코 내뱉는 일상의 말과 관행적 업무는 우리의 말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마비시킵니다. 사람은 어떤 언어를 쓰느냐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입니다. 은유되고 반복되는 언어는 현실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고위층이 결정하면 죄의식이 사라진다


나치스가 처음부터 유대인 학살 정책을 펼쳤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시온주의에 대해 친화적인 태도를 채택하었는데 나치스의 유대인 정책이 ‘최종 해결책’으로 변하는 중요한 회의가 1942년 베를린 교외 반시(Wannsee)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히틀러의 오른팔이었던 ‘하이드리히’는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최종 해결책'이 유럽 전체에 적용될 경우 발생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초청자들은 '최종 해결책'에 대한 단순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제안을 합니다. 아이히만은 이 회의의 서기였습니다. 그가 ‘최종 해결책’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지만 그는 약간의 의구심을 갖고 있었는데 회의 분위기 때문에 이러한 의구심들이 깡그리 사라지게 됩니다. 친위대나 당뿐 아니라 엘리트 공무원들이 이 피투성이의 문제에서 주도권을 갖는 명예를 얻기 위해서 서로 경쟁하고 싸우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귀로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나는 일종의 본디 올 발라도의 감정 같은 것을 느꼈다. 나는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게 느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84


여기서 ‘본디 올 발라도’는 창을 가진 자'란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반역죄를 씌워 사형을 언도한 유대 주재 로마 제5대 총독을 말합니다.


아이히만은 자기 자신의 양심을 무마시킨 가장 유력한 요소는 실제로 최종 해결책에 반대한 사람을 한 명도, 단 한 명도 볼 수가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86


자신의 상관들이 모여서 결정한 일이고, 아무도 반대하지 않아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유대인을 학살 장소로 이동시켰다(아이히만은 학살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고 유대인을 이송하거나 그들의 재산 문제를 처리하는 일 등을 담당하였습니다)는 아이히만은 무죄일까요?


전 대통령의 재판 과정에서 그리고 재벌 총수들의 배임 횡령 등의 재판 과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습니다. 바로 ‘위에서 시켜서 했다’라고 주장하는 부하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은 양가적입니다. ‘조직 생활하는 사람이니 위에서 시키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해겠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저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인데 저렇게 생각이 없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을 일상의 우리 자신에게 투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범죄행위에 대한 무사유뿐 아니라 일상의 업무에 대한 무사유도 윤리적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주장일 것입니다. 일개 샐러리맨으로서 현실적으로 회사에서 결정하면 따르지 않을 도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유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위엄을 지킬 수 있습니다.


임무의 결과만으로 평가하면 안 된다


‘최종 해결책’을 실행에 옮긴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은 적이 없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을 때 아이히만은 자신이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아이히만은 전쟁이 끝날 무렵 자신의 부하들에게 “나는 내 무덤에 웃으며 뛰어들 것이다. 500만 명의 유대인들의 죽음에 내 양심이 거리낀다는 사실이 나에게 대단한 만족감을 주기 때문에”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맹세한 대로 모든 명령에 복종했고 '자신이 의무를 항상 완수'하는데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아이히만이 회사에 다녔다면 아마도 조기 승진은 물론이고 최연소 임원이 되어서 승승장구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명령에 항상 최선을 다했고 200%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전문성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습니다. 나치스에서 유대인 이주 문제를 전문가인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맡기면 분개하기도 했습니다.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책임감과 자부심을 느끼는 직원. 오늘날 회사에서 원하는 인재상입니다. 회사는 개인에게 복종의 미덕을 찬양하지 않고, 개인은 자신의 일이 어떤 의미가 있고 타인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자문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무지도 유죄다


열심히 일했을 뿐 그 영향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지로 인해 저지른 잘못을 어디까지 책임을 저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영화가 <더 리더>입니다. 원작은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쓴 <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한나’는 자신이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즉 무지하다는 사실을 회피하면서 살아갑니다. ‘지멘스’에서 근무하다가 승진을 제안받자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들통날까 봐 히틀러 친위대에 입대하고 유태인 수용소에서 간수로 일하게 됩니다. 이 작은 무지에 대한 회피가 후일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무지의 외면은 남자 주인공이자 화자인 '미하엘'을 만났을 때에도 지속됩니다. 병약한 미하엘을 도와주다가 발전한 그들의 관계는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그리고 ‘잠시 같이 누워있기’의 의식으로 발전합니다. 전차 차장으로 근무하던 ‘한나’는 승진해서 사무직에서 일할 것을 제안받고 그녀의 문맹이 드러날까 봐 다시 도망갑니다. 어느 날 수영장에서 놀고 있는 ‘미하엘’을 멀찌감치에서 보다가 사라져서 다시는 미하엘 앞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법대생에 된 미하엘이 한나를 만난 것은 전범 재판정에서였습니다. 나치 과거와 관련된 재판을 연구하던 ‘미하엘’의 교수님은 그 재판을 한 세미나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전범 재판에서도 다시 한번 그녀는 무지가 드러날까 봐서 유대인의 학살에 관한 리포트를 자신이 썼다고 허위 진술함으로써 종신형을 선고받습니다.


미하엘은 예전에 그랬듯이 테이프를 통해서 책을 읽어줍니다. 그녀는 감옥에서 테이프를 듣고 글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미하엘에게 편지를 썼고 그 편지를 받은 미하엘의 기뻐하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녀가 책을 듣고 글을 배우는 것은 사회와 자신에 대한 '속죄'의 과정이었습니다. 무지를 감추기 위해서 들어간 나치 친위대에서 범죄를 저질렀고 무지를 감추기 미하엘을 떠났고 자신을 학대했던 자신에 대한 '속죄'였습니다.


한나의 주된 기소 내용 중 하나가 연합군이 베를린시를 폭격하던 날, 교회에 갇혀있던 유태인들을 풀어주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교회에서 사람들을 풀어주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아이히만과 똑같은 답변을 합니다. 간수의 '의무'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간단하게 그들을 도망치도록 둘 수 없는 입장이었고 그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달리 행동해야 했는지, 어떻게 달리 행동할 수 있는지 몰랐고 법정에서 오히려 판사에게 ‘판사님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무지로 인해 저지른 잘못을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할까요? 18년 만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석방을 앞둔 그녀가 자살하는 것으로 마무리함으로써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말하기의 무능’, ‘생각의 무능’, ‘판단의 무능’ 뿐만 아니라 ‘무지’로 인한 잘못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샐러리맨과 악의 평범성


아이히만은 한 번의 항소를 하지만 기각되어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아이히만은 근엄하게 교수대로 걸어가서 포도주 반 병을 마시고 의연하게 죽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장면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는 마치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하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49


상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동의를 했고 아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행위를 단지 명령에 의하여 행하더라도 그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 법적 해석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의 윤리와 도덕과 양심은 그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주장일 것입니다. 비교의 대상이 일견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우리가 조직생활을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일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우리 자신들도 알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행동들이 우리의 의도와 다르게 너무나 평범하게 조직과 사회에 그리고 결과적으로 나에게 큰 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내 안의 준법 기구를 항상 예민하게 가동하여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