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자리공(장록) 이야기

가야의 꽃 이야기

by 가야

미국자리공 – 금빛 비밀을 공유한 친구


몇 년 전 화단에 예사롭지 않게 큰 식물이 하나 불쑥 솟아났다.


날마다 쑥쑥 키가 자라나니, 호기심이 커져만 갔다. 지인에게 물어보니 그 이름은 자리공.
까마중보다 훨씬 크고, 까만 열매가 줄지어 달리는 모습은 신비롭고도 아름다웠다.


그 자리공은 내 유년 시절의 기억을 단숨에 끌어올렸다.


어린 날의 금빛 비밀


고향 뒤란 텃밭에도 자리공이 있었다.
어느 여름날, 집 앞 담배창고에 악극단이 들어왔고, 그 단원 일부가 우리 집 건넌방에 세 들어 살았다.


방 안에는 여러 악기가 있었는데,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금빛으로 번쩍이는 트럼펫.

엄마는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했지만, 어린 마음의 욕망은 숨길 수 없었다.


살금살금 다가가 그 금빛 나팔을 몰래 만져보고, 입술을 대어 불어도 보았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뒤란 툇마루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에게 속삭였다.


“나 저 금빛 나팔 불어봤다, 참말이야.”


그리고 훌쩍 자란 자리공에게도 고백했다.
자리공은 마치 고개를 끄덕이며 내 비밀을 지켜주겠노라 약속해주는 듯했다.


그날 이후, 자리공은 내 어린 시절의 든든한 비밀 친구가 되었다.

선산에서 만난 미국자리공


세월이 흘러 작년 벌초 길, 선산 초입에서 엄청나게 큰 자리공을 보았다.
그것은 자리공 가운데에서도 북아메리카 원산의 미국자리공(Phytolacca americana).


굵은 뿌리에서 뻗은 붉은빛 자주색 줄기, 아래로 늘어진 꽃차례,
그리고 계절에 따라 연한 녹색에서 홍자색, 검푸른 자색으로 변하는 열매들.


한자 이름 ‘수서상륙(垂序商陸)’은 꽃차례가 아래로 처진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열매는 광택 나는 흑자색, 새들이 즐겨 먹는 귀한 제철 식량이기도 하다.
영어 이름 Pigeonberry ― 비둘기 열매라는 뜻도 거기서 비롯된다.

약과 독, 그리고 삶의 지혜


자리공의 뿌리는 독성이 강하다. 예부터 사약에도 쓰였을 만큼 무서운 독초다.


잎, 줄기, 열매에도 독이 있어 생식하면 마비를 일으킨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은 이 식물을 삶의 지혜로 이용해왔다.


만주와 북한 지방에서는 살짝 데쳐 나물로 먹었고,
한방에서는 뿌리를 ‘미상륙(美商陸)’이라 불러 부종, 신우신염, 피부병 치료에 쓰기도 했다.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는 세 번씩 데쳐 먹기도 했으며, 열매로 젤리와 파이를 만들고
심지어 포도주 대용으로 제사에도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미국자리공은 계면활성 성분 덕분에 비누가 없던 시절 빨래에 쓰였고,
아프리카에서는 천연 살충제로도 활용되었다.


오염된 땅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으며, 새들의 먹이가 되어 씨앗을 멀리 퍼뜨리는 강인한 생명력.
그 모든 모습이 미국자리공이라는 이름 안에 담겨 있다.

꽃말과 회상


미국자리공의 꽃말은 ‘잴 수 없는 사랑’, ‘미인’.
도도한 자태와 짙은 색감의 열매 때문일까, 그 꽃말마저 매혹적이다.


나에게는 여전히 ‘비밀을 공유한 친구’라는 꽃말이 더 어울린다.


어린 날, 금빛 나팔을 몰래 만져본 흥분과 두려움,


그 모든 이야기를 아무 말 없이 들어주던 자리공.

오늘도 길가나 화단에서 미국자리공을 마주할 때면
나는 다시 그 여름날 푸른 하늘 아래, 비밀을 간직한 소녀로 돌아간다.


https://youtu.be/5xS4-S2dMvw?si=RZLnafEvSV5rpJ5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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