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5일 탄생화
오래 전, 서예를 배울 때의 일이다. 내가 글씨를 배운 선생님은 다소 괴팍하다고 할 만큼 열정적인 분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꼬박 의자에 앉아 먹을 갈고 글씨를 쓰셨다. 하루 동안 쓴 판본본 책의 한 장을 떼어 씹어 삼킬 정도로 그분의 정진은 극단적이었고, 그런 열정으로 결국 국전에서 대상을 받으셨다. 붓과 종이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어느 날 선생님이 문득 말씀하셨다.
“사향을 구해야겠어.” 뜻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자, 선생님은 이렇게 덧붙이셨다. “내 글씨는 누구도 위작할 수 없게 만들 거야. 먹을 갈 때 사향을 섞어 쓰면 글씨에서 향이 날 테니, 누가 흉내 내도 내 글씨만큼 향기 나는 건 없을 거야.”
그 말이 다소 엉뚱하게 들렸지만, 나는 고개가 숙여졌다. 자신의 글씨 하나에도 생명을 불어넣고 싶었던 사람, 그분의 예술혼이야말로 사향처럼 오래 남을 향기였다.
그때 처음 들었던 ‘사향’이라는 단어가 마음속에 깊이 남았다. 귀한 향료라는 건 알았지만, 그 향이 어떤 냄새인지, 어떤 감정을 남기는지는 알지 못했다. 지금도 사실 잘 모른다. 그러나 그 말이 주는 울림만큼은 여전히 생생하다. 사향이란 어쩌면 사람의 진심이 오래 남는 향기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떠오르는 꽃이 있다. 바로 사향장미(Musk Rose)다. 이름 속에 ‘사향’이 들어 있는 이 장미는, 향기 하나로 존재를 증명하는 듯한 꽃이다. 학명은 Rosa moschata Herrm.으로, ‘moschata’는 라틴어 muscus(사향)에서 유래했다. 서남아시아,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일대가 기원지로 알려져 있으며, 오랜 세월을 거쳐 지중해와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향기의 독특함 덕분에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귀족 정원에서도 ‘향기의 여왕’이라 불렸다.
사향장미는 키가 2~3미터가량 자라는 관목으로,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하얀 꽃을 피운다. 꽃은 홑꽃 또는 반겹 형태로 피며, 지름은 4~5센티미터 정도로 비교적 크다. 겉모습만 보면 우리나라 산과 들에 피는 찔레꽃(Rosa multiflora)과 거의 흡사하다.
둘 다 순백의 꽃잎 다섯 장, 가시 있는 줄기, 그리고 달콤한 향기를 지녔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미묘한 차이가 있다. 찔레꽃의 향기가 봄의 첫 아침공기처럼 맑고 산뜻하다면, 사향장미의 향은 여름 저녁의 공기처럼 부드럽고 묵직하다.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천천히 번져나가며 오래 남는다. 찔레꽃이 첫사랑의 향기라면, 사향장미는 이별 뒤에도 잊히지 않는 사랑의 향기다.
그렇다면 ‘사향’이란 도대체 어떤 향일까. 본래 사향은 수컷 사향노루의 향낭에서 얻은 향료를 뜻한다. 고대 중국과 페르시아에서는 약재와 향수, 그리고 편지 봉함용 향으로도 쓰였다. 오늘날에는 천연 사향 대신 식물성 혹은 합성 사향이 사용된다.
그 향은 따뜻하고 감미로우며, 약간의 동물적인 깊이를 지닌 향기로 묘사된다. 꽃의 향기 가운데 이렇게 사향의 기운을 품은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사향장미는 그 몇 안 되는 예외로, 처음엔 부드럽고 달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늘하고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그 향이야말로 인간의 감정과 닮아 있다.
사향장미에는 오래된 지중해의 설화가 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에서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한 여인이 신 앞에서 매일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눈물이 떨어진 자리마다 흰 장미가 피었고, 그 향기는 그녀의 마음처럼 슬프고 따뜻했다. 사람들은 그 꽃을 ‘사향장미’라 불렀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수도원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에게 헌신한 한 수녀가 잃어버린 사랑을 그리워하며 매일 정원에서 기도하자, 그 자리에서 향기로운 흰 장미가 피어났다고 한다. 그 향기에는 욕망이 아닌 헌신과 순결이 담겨 있었다.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서 피어난 향기, 그것이 사향장미의 본질이다.
르네상스 이후 많은 예술가들이 사향장미를 사랑했다. 영국 시인 토머스 캠피언은 “그 향은 사랑의 끝이 아니라, 그리움의 시작이다”라고 노래했고,
프랑스 화가 앙리 판탱 라투르는 사향장미를 즐겨 그렸다. 그의 화폭 속 장미는 화려하지 않다. 약간 빛이 바랜 흰 꽃, 그러나 화면 전체를 감싸는 부드러운 온기와 향기의 기운. 그는 아마 이 꽃이 품은 조용한 열정을 그리고 싶었던 것일 것이다.
음악에서도 이 향기는 이어진다. 프랑스 작곡가 레이날도 안(Reynaldo Hahn)의 가곡 <L’Heure exquise>는 “그대 향기 속에서 나는 잠이 든다”라는 구절로 끝난다. 사랑이 끝나도 남는 향기, 그것이 음악이든 그림이든 언제나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향장미의 꽃말은 ‘변덕스런 사랑’, ‘예측할 수 없는 마음’이다. 하얀 꽃잎은 순수함을 상징하지만, 그 향기에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다. 사랑은 언제나 일정하지 않다. 기쁨과 서운함, 열정과 냉정이 교차하며, 우리는 그 안에서 조금씩 성숙해진다. 사향장미의 향기도 그처럼 단순하지 않다. 은근히 번져나가며, 때로는 따뜻하게, 때로는 아릿하게 남는다.
사향장미를 바라보면, 나는 다시 서예실의 그 선생님을 떠올린다. 사향의 향기로 자신의 글씨를 지키고 싶었던 분. 그분의 혼은 이미 그 향기 속에 살아 있었던 것이 아닐까. 사향장미의 향기도 그렇다. 사랑이 떠난 자리에도 향기는 남는다. 그 향은 기억의 깊은 곳에서 우리를 다시 부른다.
12월 25일, 한 해의 마지막 날에 나는 이 꽃 앞에서 조용히 묻는다.
당신의 마음은 지금 어떤 향기로 남아 있나요?
사향장미
• 학명 Rosa moschata
• 원산지 히말라야 산지
• 영명 Musk Rose
• 꽃말 매혹, 순수한 사랑, 유혹
https://youtu.be/aBt6RavI7xw?si=M769H_SoiKLiyG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