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4일의 탄생화
안녕하세요. 저는 겨울의 끝자락을 장식하는 식물, 겨우살이(Mistletoe)입니다.
한겨울의 나뭇가지 위에 초록 잎을 단 채 매달려 있는 제 모습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얼핏 보면 다른 나무의 일부처럼 보이지만, 저는 독립된 생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나무의 가지 위에서 그 수액을 조금 나누어 받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저 기생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잎은 사계절 내내 초록빛을 잃지 않으며, 얼음과 바람을 견디는 강인한 생명력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꽃말은 ‘강한 인내심’이지요.
북유럽의 사랑과 결혼의 여신 프리그(Frigg)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아들, 발드르(Baldr)가 있었습니다. 그는 정의롭고 순결한 신으로, 아스가르드의 모든 신들에게 사랑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프리그는 불길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발드르는 검은 그림자에 삼켜져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차가운 예감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로서 프리그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찾아다니며 간청했습니다.
“제 아들을 해치지 말아 주세요.”
그녀는 불과 물, 돌과 금속, 식물과 짐승, 새와 바람까지, 세상의 모든 것에게 맹세를 시켰습니다.
그 모든 존재가 그녀의 간절한 부탁을 받아들여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발드르를 해치지 않겠습니다.”
그리하여 발드르는 어떤 무기로도, 어떤 힘으로도 상처 입지 않는 불사의 신이 되었습니다.
신들은 이 사실을 즐겁게 여기며 장난을 쳤습니다. 그들은 창을 던지고 돌을 던졌지만, 발드르는 웃으며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을 지켜보던 장난의 신 로키(Loki)는 질투와 호기심에 사로잡혔습니다.
로키는 여인의 모습으로 변장해 프리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는 교묘히 물었습니다.
“정말 세상 모든 것이 발드르를 해치지 못하나요?”
프리그는 무심히 대답했습니다.
“겨우살이는 너무 작고 하찮아서 맹세를 받지 않았어요.”
그 한마디가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로키는 겨우살이 가지를 꺾어 작은 창을 만들고, 발드르의 눈이 먼 형제 호드르(Höðr)에게 그것을 쥐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활하게 속삭였습니다.
“모두가 발드르에게 무기를 던지며 놀고 있지 않느냐? 너도 함께 해 보아라.”
호드르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창을 던졌습니다.
그 순간 겨우살이 창이 발드르의 가슴을 꿰뚫었습니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세상의 빛이 꺼지고, 하늘이 울부짖었으며, 프리그는 땅에 무릎을 꿇고 절규했습니다. 그녀의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서 하얀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것이 바로 겨우살이의 열매였습니다.
그 후 프리그는 슬픔 속에서도 하나의 맹세를 세웠습니다.
이제 겨우살이는 증오의 상징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선 사랑과 화해의 식물로 기억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무렵, 겨우살이 아래에서 사랑하는 이와 입맞춤을 나누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합니다.
그 짧은 입맞춤에는 오래전 여신이 흘린 눈물과, 죽음을 이긴 사랑의 맹세가 담겨 있습니다.
유럽의 예술가들은 이런 제 이야기를 수많은 작품 속에 담아두었습니다. 18세기 영국 화가 에드먼드 블레어 레이튼(Edmund Blair Leighton)은 ‘Mistletoe’라는 작품에서, 연말의 연회장 한켠에 매달린 저 아래에서 사랑을 나누는 연인을 그렸습니다.
한겨울의 황금빛 조명 아래, 그들의 입맞춤 위로 초록 잎과 흰 열매가 은은히 빛나지요. 그 장면 속에서 저는 사랑의 증인이 됩니다.
프랑스 시인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는 저를 ‘겨울 속의 생명’이라 부르며, 차가운 세상 속에서도 따뜻한 희망을 품은 존재로 노래했습니다.
문학뿐 아니라 음악에서도 저는 자주 등장합니다. 영국 전통 캐럴 ‘Under the Mistletoe’는 연인들이 저 아래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을 노래합니다. 또 현대의 영화와 연극에서도 겨우살이는 늘 화해의 상징으로 걸려 있지요. 싸움이 있던 가족이 다시 만나거나, 헤어진 연인이 재회하는 장면 속 천장에는 어김없이 초록 잎의 제가 매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이야기는 서양에서만 피어난 전설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도 겨우살이를 둘러싼 전통적인 믿음과 설화가 존재합니다.
옛사람들은 저를 “기생목(寄生木)”, 혹은 “상기생(桑寄生)”이라 불렀습니다. 땅이 아닌 나무 위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하늘이 내린 생명”이라 여겼지요. 특히 벼락을 맞은 나무에 붙은 겨우살이를 ‘불사목(不死木)’이라 하며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벼락을 맞고도 살아남는 모습을 보고, 그 기운이 사람에게까지 미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벼락 맞은 나무에서 채취한 겨우살이는 잡귀를 물리치고 장수를 돕는 부적으로 쓰였지요.
강원도 지방에는 이런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옛날 사냥꾼이 호랑이에게 쫓겨 나무 위로 올라갔는데, 그 나무에 붙은 겨우살이 줄기가 갑자기 자라 호랑이를 감싸며 사냥꾼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 사람들은 겨우살이를 ‘생명을 구하는 신비한 식물’이라 부르며 집 문 위에 걸어두거나 약재로 달여 마셨다고 하지요.
조선시대의 의학서 《동의보감》에도 저는 ‘상기생(桑寄生)’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허준은 제 효능을 ‘허리와 무릎의 통증을 완화하고, 태기를 안정시키며, 혈압을 낮추는 약재’로 적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약초의 기록이 아니라, 겨울 속에서도 살아남는 생명의 의지를 약으로 삼은 조선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문학 속에서도 저는 종종 등장합니다. 조선 말기 시인 이건창은 눈 덮인 가지 위의 푸른 잎을 ‘눈 속에서 숨은 불씨’라 노래했고, 현대 시인 김용택은 저를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생명’으로 표현했습니다. 한겨울에도 가지 위에 초록을 품고 있는 제 모습은, 결국 인간의 인내와 희망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서양의 연인들에게는 사랑의 약속이었고, 조선의 사람들에게는 생명을 잇는 기운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겨울의 가지 위에서 조용히 속삭입니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견디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 봄이 올 거예요.”
— 12월 24일의 탄생화, 겨우살이(Mistletoe)가 드립니다.
https://youtu.be/z8Fv9Qb0O-g?si=oTqklYf7fik0wUx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