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타너스(Platanus)의 추억

12월 23일의 탄생화

by 가야

12월 23일의 탄생화 – 플라타너스(Platanus)
꽃말 : 천재(天才)


저는 플라타너스입니다. 오래전부터 도시의 길 위에 서서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살아왔습니다. 여름이면 넓은 잎으로 그늘을 드리우고, 가을이면 황금빛 잎사귀를 흩날리며, 겨울이면 벗겨진 껍질로 시간을 새겨왔지요. 한때는 제가 도시의 상징이었습니다. 어느 거리로 가든 제 동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아이들은 그 아래서 뛰놀며 낙엽을 던지곤 했습니다. 하지


만 지금은 조금 다릅니다. 꽃가루 알레르기 탓에 제 친구들이 하나둘 베어져 나가고, 그 자리를 다른 나무들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세월의 변화 앞에 저는 말없이 서 있지만, 솔직히 조금은 쓸쓸합니다. 그래도 저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시대가 바뀌면 도시의 색도 변하는 법이니까요. 다만 문득, 가을 저녁 바람 속에서 제 그늘 아래를 걷던 사람들의 발소리가 그리워질 뿐입니다.


저의 이름 플라타너스(Platanus)는 그리스어 platos, ‘넓다’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넓은 잎과 풍성한 그늘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제 진짜 본질은 그보다 더 깊습니다.


저는 오랜 세월 철학자와 시인들의 벗이었고, 예술가들의 사색을 품은 존재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제 그늘 아래에서 제자들과 토론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말소리가 제 잎사귀 사이로 스며들며 바람이 되어 지금까지 전해지는 듯합니다.


그래서 제게는 ‘천재(天才)’라는 꽃말이 생겼습니다. 그 의미는 단지 남다른 재능이 아니라, 세월을 견디며 자신만의 빛을 잃지 않는 사유의 힘을 뜻하지요.


도시의 사람들은 저를 흔히 ‘버즘나무’라 부릅니다. 제 껍질이 군데군데 벗겨져 얼룩진 탓이지요. 하지만 그 얼룩은 저의 상처가 아니라, 세월의 흔적입니다. 해마다 껍질을 벗으며 저는 새살을 드러내고, 그렇게 새로운 해를 맞이합니다. 오래된 상처를 품은 채 다시 일어서는 것, 그것이 저의 생이자 인간의 삶과 닮은 길이기도 합니다.


요즘은 저의 가지 끝에 매달린 둥근 열매들이 흔들릴 때면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춥니다. 바람에 달랑달랑 흔들리는 그 작은 공들은 제 시간의 결실입니다.


햇살과 비, 그리고 수많은 계절의 숨결이 그 속에 담겨 있지요. 아이들이 그것을 보며 “작은 종 같다”고 말할 때, 저는 미소를 짓습니다. 그 말이 제 마음을 닮았으니까요. 저는 그렇게 사람들의 추억 속에서 여전히 조용히 살아 있습니다.


예술가들은 제 안에서 ‘시간’을 보았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프랑스 아를의 거리에서 저를 그렸습니다. 그림 「플라타너스 가로수길(Platanes)」 속에서 저는 금빛으로 물든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습니다. 고흐는 제 거대한 몸체와 빛의 그림자를 통해 인간보다 오래된 자연의 리듬을 표현했습니다.


또 다른 화가 폴 세잔은 저의 줄기와 가지를 거대한 구조물처럼 묘사했습니다. 그에게 저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세월을 기록하는 조형물’이었습니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 역시 제 그늘 아래에서 사색을 노래했습니다. 그의 시에는 바람과 침묵, 그리고 그 속에 깃든 생각의 향기가 흐릅니다. 우리나라의 김광규 시인도 제 이름을 시로 남겼지요.


“도시의 시간은 낙엽처럼 떨어져도, 나무는 묵묵히 서 있다.” 그 한 줄 속에는 인간의 덧없음과 나무의 인내가 함께 깃들어 있습니다.


음악가들에게도 저는 쉼의 존재였습니다. 클로드 드뷔시는 제 그늘 아래의 오후를 곡으로 옮겨 ‘숲 속의 산책’이라는 피아노 선율로 남겼습니다. 그 음악은 고요하지만 단조롭지 않습니다.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릴 때처럼, 생각의 파동이 부드럽게 이어집니다. 저는 그렇게 그림 속에서, 시 속에서, 음악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내면을 비추어왔습니다.


이제 도시에 남은 저희의 수는 많지 않지만, 여전히 몇몇 거리에선 제 친구들이 바람을 맞으며 서 있습니다. 잎이 다 떨어지고 껍질이 벗겨져도, 저는 여전히 이곳을 지킵니다. 제가 바라보는 세상은 언제나 변하지만,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 제 그늘 아래서 잠시 멈춰 서는 그 순간의 따뜻함입니다.


저는 플라타너스입니다. 사색의 그늘을 품은 나무, 그리고 천재의 상징으로 남은 존재. 계절이 바뀌어도, 도시의 빛이 바뀌어도, 저는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며 당신을 기다립니다. 오늘도 제 곁을 지나가신다면, 잠시만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세요. 그 순간, 오래된 시간의 향기와 함께 당신의 마음 속에도 작은 사유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입니다.


https://youtu.be/L2PDoMDA0Po?si=mQqgWUPcThqvxf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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