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2일 탄생화
12월 22일, 동지를 막 지난 차가운 겨울 한가운데서 저는 문득 뜨거운 태양 아래 눈부시게 빛나던 꽃들을 떠올립니다. 특히 해마다 화단 가득 화려함을 쏟아내는 백일홍을 생각하면, 이 추위 속에서도 마음 한구석이 붉게 달아오르는 듯합니다. 여름이면 정원을 환히 밝히던 그 꽃이 지금 이 시절에는 오히려 더 선명한 기억으로 되살아옵니다.
백일 동안 붉게 핀다고 하여 이름 붙은 백일홍 Zinnia elegans은 멕시코의 강렬한 태양 아래서 건너온 여름의 주인공입니다. ‘화무십일홍’이라는 덧없음을 말하는 격언에 정면으로 맞서듯, 이 꽃은 6월부터 서리가 내릴 때까지 쉼 없이 피어오릅니다. 붉음은 기본이고 노랑, 주황, 분홍, 흰색까지 다채로운 색감으로 시선을 사로잡으며 그 존재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러나 백일홍을 단순한 여름꽃으로만 기억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뒤에 깃든 애틋한 전설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처녀를 뒤로한 채 이무기를 무찌르러 떠난 왕자가 승리하면 하얀 깃발을, 패하면 붉은 깃발을 달기로 약속했다는 이야기.
그는 결국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무기의 피로 붉게 물든 깃발을 보고 처녀는 왕자가 죽었다고 오해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 무덤 위에서 피어났다는 붉은 꽃이 바로 백일홍이라지요.
이 전설은 백일홍이 지닌 꽃말 ‘인연’과 ‘그리움’에 깊은 서사를 선물합니다. 특히 노란 백일홍이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뜻하는 것처럼, 이 꽃의 색채는 단순한 미적 요소를 넘어 마음속에 남은 사람을 오래 기억하게 하는 상징이 됩니다.
이처럼 강렬하고도 오래 피는 성질 때문일까요. 백일홍은 예술가들에게도 ‘시간을 기억하는 꽃’으로 자주 등장해 왔습니다. 멕시코 출신의 화가들이 백일홍을 반복적으로 그려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19세기 멕시코 민속화 전통에서는 진니아를 ‘영속성’과 ‘기억의 빛’을 상징하는 소재로 사용했으며, 여름의 뜨거운 생동감을 화폭에 담아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특히 멕시코 근대 화가 판초 피에드라(Pancho Piedra)의 정물화에는 백일홍이 유난히 자주 등장합니다. 단순한 꽃 한 송이를 넘어, 오래 지속되는 사랑과 삶의 인연을 그 자체로 표현하려는 화가의 의도가 묻어납니다. 화병에 꽂힌 진니아는 금방 시들지 않고 당당히 서 있으며, 그림 속에서조차 계절의 흐름에 흔들리지 않는 꽃처럼 그려집니다.
또한 미국의 사진작가 론 반 더 린트(Ron van der Linde)가 촬영한 ‘Zinnia Series’는 백일홍의 색채와 질감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탐구한 작품입니다. 활짝 피어난 순간과 서서히 빛이 옅어지는 순간까지 모두 기록하며, 인간이 지나가는 계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은유적 질문을 던집니다. 그 여정 자체가 바로 백일홍이 가진 ‘기억의 미학’을 증명합니다.
예술 속에서 백일홍은 강렬함을 넘어 ‘지속되는 감정’, ‘머물다 떠나는 존재’, ‘다시 피어날 기억’을 상징합니다. 겨울에 이 꽃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라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계절의 온기를, 이 꽃이 가장 오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백일홍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그 소박한 기쁨을 아실 겁니다. 이 꽃은 강인하고 성실합니다. 한여름 가뭄에도 쉽게 시들지 않고, 뜨거운 햇볕을 먹으며 자라는 모습에서 자연의 확고한 생명력을 느끼게 합니다.
꽃이 지기 시작하면 씨앗을 받아두었다가 다음 해 봄에 다시 파종하는 일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 반복되는 순환 속에서 우리는 생명의 리듬을 배우고, 기다림과 정성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확인합니다.
겨울 문턱에서 백일홍을 떠올리는 지금, 저는 벌써부터 다가올 봄의 화단을 그려봅니다. 백일홍은 인연의 소중함과 그리움의 아름다움을 백일이라는 시간으로 증명하는, 참으로 고마운 꽃입니다.
✤ 말미 요약 정보
· 백일홍 Zinnia elegans
· 원산지: 멕시코
· 꽃말: 인연·그리움, 색에 따라 의미 변화
· 개화기: 6월~서리 내릴 때까지 매우 장기간
· 특징: 고온·건조에 강하고 재배가 쉬움, 씨앗 채종 가능
· 예술 속 백일홍: 멕시코 민속화·근대 회화·사진 예술에서 ‘기억·시간·영속성’을 상징하며 자주 등장함
https://youtu.be/ykcH3NNeOo0?si=VlF9WiGUKUylRld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