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6일 탄생화
크리스마스의 환한 조명이 서서히 빛을 거두고, 마음까지 묵직해지는 겨울의 한가운데. 한 해의 끝자락을 조용히 준비하는 이 날, 나에게 떠오르는 존재는 요란한 축제의 꽃이 아니라 긴 세월을 건너온 고목, 비자나무다. 그늘 깊은 숲속에서 묵묵히 자라온 이 나무의 꽃말은 사랑스러운 추억. 빠른 기쁨보다 오래 남는 정서를 품은 말이 오늘의 공기와 닮아 있다.
나는 이 꽃말이 새삼 위로처럼 다가온다. 화려한 순간이 아닌, 오랫동안 마음을 지탱해준 기억이 결국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는 사실을 비자나무는 천천히, 그러나 확고히 가르쳐준다.
비자나무를 생각할 때면 제주 비자림의 적막한 숲이 떠오른다. 천천히, 거의 미동도 없이 자라는 나무들. 1년에 1mm 남짓 늘어나는 생장 속도 덕분에, 그곳의 나무들은 이미 수백 년의 시간을 온몸에 새기고 있다. 수령 500년, 800년을 훌쩍 넘긴 고목 앞에 서면 말문이 막힌다. 인간이 만든 어떤 기록보다 정직하고, 어떤 예술보다 단단한 시간의 조각들.
그 느림은 결코 뒤처짐이 아니다. 비자나무는 말한다. 가장 귀한 것은 시간이 걸리는 법이라고. 서두르지 않고, 휘둘리지 않고, 제 속도로 뿌리를 내리는 일. 그 오랜 기다림 끝에 비자 열매는 약재가 되고,
목재는 명품 바둑판이 된다. 단단함과 고귀함이 서로를 완성하는 방식. 나는 이 나무의 태도가 늘 부럽다. 버티는 일이 곧 품격이 되는 몇 안 되는 존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비자나무의 열매는 우리 조상들이 사랑하던 약재였다. 몸속의 불필요한 것들을 비워내고, 균형을 회복하는 데 쓰였다. 생명의 질서를 바로잡아 주는 작은 씨앗.
그리고 나는 이 효능에서 꽃말의 깊이를 다시 읽어낸다. 좋은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속의 해로운 것들을 흘려보내야 한다는 삶의 지혜. 연말이 되면 괜스레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도 아마 버리지 못한 감정들이 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자나무는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조용히 속삭여 온 듯하다. 비워내야 채워질 수 있다고. 아쉬움과 걱정은 놓아 보내고, 따뜻했던 기억들만 남기라고.
비자나무가 한겨울에도 푸른 잎을 잃지 않는 것처럼, 우리 마음속의 소중한 추억들도 혹독한 세월 속에서 오히려 더 빛나기도 한다. 바로 그 강인함이 비자나무의 기상과 닮아 있다.
12월 26일의 정적 속에서 나는 문득 생각한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비자나무의 나이테처럼 아주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쌓여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쁨도, 슬픔도, 어쩌면 아무 일 없던 평범한 날들까지도 모두 켜켜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 수백 년의 세월을 버티는 비자나무처럼 우리 삶 역시 시간을 거스르는 고귀함을 품고 있는 건 아닐까.
따뜻했던 어느 겨울날의 포근한 기억, 누구도 모르게 스스로 견뎌낸 순간, 사랑했고 또 사랑받았던 일들.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뿌리가 되어 있다. 오늘의 나를 이루는 이 조용한 힘을 떠올리면, 비자림을 걷는 상상이 자연스레 펼쳐진다. 피톤치드가 가득한 숲길을 따라 걸으며 삶의 시간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일. 그 속에서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기억 하나가 은은히 떠오른다.
솔직히 나는 아직 비자나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 비자나무에 대한 글을 쓰면서 조금 미안해진다. 그렇지만 언젠가 그 숲 앞에 서게 되면, 오늘의 이 마음이 나이테처럼 조용히 새겨질 것 같다.
오늘의 나는 천년의 숲을 이루는 나이테 한 줄일지도 모른다. 아주 느리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 방식으로.
요약 정보
· 비자나무는 1년에 1mm 남짓 자라는 느린 생장 속도로 수백 년을 견디는 나무입니다.
· 꽃말은 사랑스러운 추억으로,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기억을 상징합니다.
· 비자 열매는 예로부터 몸의 균형을 회복시키는 약재로 사용되었습니다.
· 오늘 하루를 비자나무의 나이테처럼 고귀한 시간으로 쌓아가는 마음가짐을 전합니다.
https://youtu.be/yfQQ1e3Uo8I?si=CaatO5E8r9c6XiZ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