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허브 이야기
오래된 한약방 근처를 지날 때면, 발걸음보다 먼저 마중 나오는 향기가 있다. 코끝을 툭 건드리고는 이내 가슴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묵직하게 가라앉는 향. 달큰하면서도 알싸한 그 향기의 정체는 대개 '천궁(川芎)'이다.
우리는 살면서 가끔 '체(滯)'한다. 음식이 얹히기도 하지만, 때로는 감정이 얹히고, 사람 사이의 인연이 얹히며, 흐르지 못한 혈액이 몸 구석구석에 고여 통증이 되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 조상들은 천궁을 찾았다. 막힌 곳을 뚫고, 고인 것을 흐르게 하며, 멈춰버린 생의 리듬을 다시 뛰게 하는 힘이 이 작은 뿌리 식물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천궁의 이름에는 '하늘의 궁전(天宮)에서 내린 약초'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전설 속 신선이 두통으로 고생하는 선비에게 건넸다는 이 풀은, 사실 하늘의 선물이라기보다 대지가 인간에게 건네는 가장 지극한 위로에 가깝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천궁은 제 몸을 비워 뿌리에 모든 에너지를 모은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태생적 결핍을 오히려 뿌리의 단단함으로 승화시킨 셈이다. 그 단단한 뿌리를 쌀뜨물에 담가 독한 기운을 덜어내고 은근한 불에 달여내면, 비로소 고통을 잠재우는 부드러운 약(藥)이 된다.
한방에서는 천궁을 일컬어 '혈국(血局)'이라 부른다. 피가 가는 길목마다 천궁이 서 있다는 뜻이다. 기운이 맺히고 피가 엉겨 붙어 생기는 통증들을 천궁은 특유의 따뜻하고 활달한 기운으로 흩어버린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찾아올 때, 혹은 매달 찾아오는 여자의 고통이 몸을 짓누를 때, 천궁은 조용히 몸속으로 들어가 닫힌 문을 두드린다. "이제 그만 흘러가라"고, "머물러 아프지 말라"고 다독인다. 그래서 천궁의 꽃말은 '기약'과 '기다림'인지도 모른다. 아픔이 지나가고 다시 건강한 순환이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직한 약속 말이다.
천궁은 홀로 빛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당귀(當歸)'라는 오랜 벗과 함께할 때 가장 아름답다. 당귀가 부족한 피를 채워주는 자비로운 어머니라면, 천궁은 그 피가 길을 잃지 않도록 이끌어주는 다정한 길잡이다.
둘이 만나 '궁귀차(川歸茶)'가 되면 맛은 깊어지고 효능은 온전해진다. 채우는 것만큼 비우고 흐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삶의 지혜를, 우리는 찻잔 속에서 마주하게 된다.
지금 당신의 삶 어딘가가 막혀 있다면, 혹은 설명할 수 없는 무거운 통증이 마음과 몸을 짓누르고 있다면 천궁의 향기를 곁에 두어 보길 권한다.
그 향기는 단순히 코를 자극하는 냄새가 아니라, 멈춰 선 당신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려는 대지의 응원이다. 쌀뜨물에 잘 씻겨진 천궁 한 조각이 끓는 물 속에서 제 향을 온전히 내어놓듯, 우리네 삶도 시련을 지나 더욱 깊고 맑게 흐를 수 있기를.
천궁, 그 그윽한 향기 속에는 '순환'이라는 위대한 생명의 원리가 숨 쉬고 있다.
요약정보
· 천궁(川芎)은 막힌 기혈과 혈액 순환을 풀어주는 뿌리 약초입니다
· 두통, 어혈, 생리통 등 ‘흐르지 않아 생기는 통증’에 쓰여 왔습니다
· 따뜻하고 활달한 기운으로 몸의 순환을 돕습니다
· 당귀와 함께할 때 보혈과 순환의 조화가 완성됩니다
[다음 편 예고] 천궁의 영원한 단짝, 잃어버린 기운을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따뜻한 모성(母性)의 허브 '당귀(當歸)'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https://youtu.be/LvkspyOi8TQ?si=AOc6QNxMgYJ_ceI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