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철 더욱 붉게 빛나는 남천(南天) 이야기

가야의 꽃 이야기

by 가야

겨울 끝에서 만난 붉은 문장

― 남천(南天, Nandina)이 들려주는 전화위복의 이야기


을왕저수지에 닿았을 때 바람은 유난히 차가웠습니다. 물가에 서 있던 나무들은 모두 잎을 떨구고 겨울의 빈 문장처럼 말이 없었는데, 그 적막한 풍경 속에서 유독 또렷하게 빛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초록과 붉음 사이 어딘가에서 조용히 불을 밝히던 남천의 열매였습니다. 마치 겨울이 남긴 마지막 문장처럼, 작고 단단한 붉은 점들이 허공에 또박또박 적혀 있었습니다.


남천은 매자나무과에 속하는 상록 관목으로 본래 중국에서 건너왔습니다. 한때는 남부 지방의 울타리나 정원에서만 볼 수 있었지만, 기온이 오르면서 이제는 서울의 아파트 화단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납니다. 여름이면 흰 꽃이 안개처럼 피고, 가을이면 잎이 깊은 단풍으로 물들며, 겨울이면 선홍의 열매가 이듬해 봄까지 가지를 지킵니다. 한 해의 사계가 한 그루 안에서 조용히 순환하는 셈입니다.


화가 복으로 바뀌는 자리


남천의 꽃말은 ‘전화위복(轉禍爲福)’입니다. 화가 굴러 복이 된다는 이 문장은, 단순한 덕담이 아니라 오랜 세월 사람들이 남천 곁에서 길어 올린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집안에 남천을 심으면 나쁜 기운이 물러가고 행운이 머문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인지 남천은 문 앞이나 담장 곁에 서서 집을 지키는 작은 수문장처럼 살아왔습니다.


중국에서는 남천을 ‘성죽(聖竹)’, 곧 성스러운 대나무라 불렀습니다. 신선이 먹는 음식에 남천 잎을 더하면 백발이 검어지고 흐린 눈이 밝아진다는 전설도 전합니다.


실제로 남천은 오래전부터 약재로 쓰였습니다. 열매는 ‘남천실’이라 하여 기침을 멎게 하고, 잎의 나나딘 성분은 살균과 해독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생선 요리 아래에 남천 잎을 깔아 식중독을 막는 지혜로 활용했다지요. 다만 열매에는 약한 독성이 있어 함부로 섭취하지 말라는 경고도 함께 전해 내려옵니다. 약과 독이 한 뿌리라는 사실을, 남천은 조용히 일러줍니다.


그림과 시 속의 붉은 별


예술가들에게 남천은 겨울의 색채를 완성하는 존재였습니다. 일본 에도 시대 화가 오가타 고린의 병풍 속에서 남천은 설경과 나란히 놓여, 눈의 흰빛과 열매의 붉음을 대비시키는 장치가 되었습니다. 하이쿠 시인들은 ‘남천 한 알’만으로도 한겨울의 적막과 생의 온기를 동시에 노래했습니다.


“눈 쌓인 뜰 / 남천 한 송이 붉어 / 저녁이 온다” 같은 짧은 문장 속에서 남천은 계절과 인간 사이의 가교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민화에서도 남천은 자주 등장합니다. 붉은 열매는 다산과 길상의 상징이 되었고, 분재로 키워 사랑채에 두는 풍습은 선비의 취향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추위를 견디며 겨울을 버티는 모습이 선비의 기개와 닮았다고 여긴 까닭입니다. 자연을 바라보는 미학이 곧 삶의 태도였던 시대, 남천은 작지만 또렷한 스승이었을 것입니다.


겨울 새들이 읽는 열매


한겨울이 깊어지면 남천은 새들의 식탁이 됩니다. 먹이가 귀해진 직박구리와 까치들이 붉은 열매를 찾아오지요. 열매에 약간의 알코올 성분이 있어, 많이 먹은 새들이 비틀거리기도 한다는 이야기는 조금 우습고도 따뜻합니다. 인간이 불을 피우듯, 새들은 남천으로 겨울을 견딥니다. 그렇게 남천은 식물이면서 동시에 한 계절의 피난처가 됩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저런 나무 한 그루가 필요하지 않을까. 추운 날 마음이 갈 곳을 잃을 때, 조용히 기대 설 수 있는 붉은 자리 말입니다.


남천이 건네는 작은 위로


을왕저수지의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남천 곁에 서 있자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습니다. 겨울을 견딘다는 것은 거대한 결심이 아니라, 저렇게 작은 열매 하나를 끝까지 지켜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삶이 때때로 혹독한 계절을 건너게 할지라도, 어딘가에는 분명 전화위복의 문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남천은 말없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붉은 문장처럼 또박또박, 겨울의 여백 위에.


요약정보

· 남천(南天, Nandina domestica)은 매자나무과 상록 관목으로 중국 원산
· 6~7월 흰 꽃, 가을 단풍, 겨울 선홍색 열매가 특징
· 꽃말은 전화위복(轉禍爲福), 액운을 막고 복을 부른다는 상징
· 한방에서 남천실은 진해·천식 완화에 활용, 잎은 살균·해독 작용
· 열매에 약한 독성 있어 임의 섭취 금물
· 동아시아 회화와 하이쿠, 민화에서 길상과 절개의 상징으로 등장


https://youtu.be/UXiwyVhqJe4?si=zQKjejQqsFy9_5q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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