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집

by 이가연

비전 보드란 역시, 까먹고 있다 보면 이루어진다. 내 마음속에 늘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 매달리지 않고 좀 잊고 살았을 때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영국 유학이 그랬다. 어느 날 갑자기 그 꿈이 이루어질 환경이 주어진다. 이미 내 마음속에 깊게 뿌리 내려져 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휙휙 이루어진다.


2017년에 사진으로 만든 비전 보드도 있지만, 작년에 친구가 선물로 줘서 적어둔 꿈 노트도 있다. 'How do you see yourself in three years' time? 3년 뒤에 어떻게 지내고 있을 것 같냐'는 질문에 '2027'이라는 숫자를 적어두곤, 제일 먼저 미니앨범 발매를 적었다. 그건 올해 했다.


다음은 순서대로 OST 발매, 라디오 게스트 출연, 잠실 집 내 꺼라 적혀있다. 잠실 집이 무엇이냐면...


2023년 9월 영국 가기 직전에도 몇 주, 그리고 작년 3-4월 한국 들어왔을 때에도 지냈던 집이다. 특히 작년 에 그 집에선 참으로 천국 같았다. 한국 도착해서 처음 먹었던 배달 음식 왔을 때 영상도 찍어놨다. 무슨 이틀 굶은 사람 같았다. 잠실이다. 얼마나 근방에 배달시킬 곳이 많겠는가...


월세 2nn만 원 집이라고 한다. 인간은 응당 숫자를 좋아하니 그걸로도 충분한 설명이 되겠지만, 더 얘기해 보겠다. 가장 좋았던 건 롯데타워뷰다.


나는 혼술을 못 한다. 누군가랑 전화 통화라도 하면서 마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목구멍만 따갑고 아프고 안 넘어간다. 그것도 그냥 맥주도 아니고, 호로요이 따위의 도수 낮은 복숭아맛 맥주도 그렇다. 그런데 그 집에선 아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혼술을 즐겼다. 롯데타워뷰가 바로 그 안주다. 혼자서도 맥주 캔이 목에 넘어가는 걸 보고 참 신기해했다.


'이게 힐링이지'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모니터 스크린에 분위기 좋은 재즈나 Lo-fi 음악 틀어놓고, 호로요이 하나 까서 캬아 마시는 게 참 좋았다. 그래도 두 잔은 못 마신다. 그 집이라 해도 두 잔 마시려면 사람이 있어야 한다. 여의도 집에선 그게 불가하다. 내가 성인 된 지가 몇 년인데, 몇 번을 혼자 맥주 캔 까봤지만 안 된다. 난 앞으로도 친구가 없을 거다. 그러니 혼자서 즐길 수 있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 연애하면 정말 술 마시고 싶다. 늘 누가 술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참 난감했다. 연례행사 같은 일이니까, 누군가랑 같이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그걸 절대 안 놓치는 거다. 올해만 봐도 5월, 9월 영국 갔을 때만 마셨다... 진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면 어떻게든 마셨을 거다.


절로 맥주를 부르는 뷰도 있다만, 그만큼 편안한 인테리어와 분위기를 갖추기도 했다. 낮에 봐도 예쁜 집이다. 거실 하나, 작은 방 하나 있는 구조지만 거실이 문으로 열고 닫을 수 있게 나뉘어 있다. 그 문을 닫으면 안 쪽은 침실과 드레스룸이 되는 셈이다. 거실에 방 두 개라고 봐도 무방하다.


작은 방에는 내 디지털 피아노를 두면 된다. 거기에 책상 하나만 들어가도 그 방은 꽉 찬다. 더할 나위 없는 연습실이다. 연습실이란 자고로 원래 그 방보다도 훨씬 째깐하다. 그 건물은 다 회사원들이 살아서 평일 낮에는 연습해도 된다고 들었다. 물론 눈치가 많이 보여서 그다지 노래는 안 부르긴 했다. 노래 부르기엔 여의도 집이 훨씬 낫다만, 대신 그 집은 더 집중해서 할 수 있다. 여의도 집은 지금 피아노 치며 유튜브 찍는 방이 옆에 엘리베이터 소음 때문에 굉장히 들어가기 싫어한다.


심리적으로 집은 너무도 중요하다. 집이 안정되지 않으면, 극단적으로 말해 계속 정신과 약 찾게 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물론 그 집에 있으면서 마냥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상당히 힘든 시기에 그 집에 머물렀다. '이렇게 혼자 살기에는 호화로운 집에 살면서도 이렇다니. SNS에 BMW 차 안에서 펑펑 울고 싶다, 에르메스 가방 던지면서 울고 싶다 하는 뻘글에 왜 공감이 안 됐는지 이해가 된다. 내가 그러고 있으니까. 난 재벌, 연예인도 아닌데 왜 이렇게 그쪽으로 공감이 되냐.' 싶었다.


내가 살았던 시기가, 영국이랑 비교가 매우 되어서 그랬던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당시 기숙사가 옆방 소음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서, 언제 시끄러울지 모른다는 불안 없이 침대에 누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근데 그런 생각이 들면 다시 그 숫자를 꺼내 들면 된다... 그 월세로 런던에서는 작은 원룸을 구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집에서는 그 크기에, 그 식생활이 가능하다. 그거만으로도, 영국 가고 싶은 욕구가 안 들 것이다. 이 역시도 특장점이다. 여의도는 나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답답한 주거지다. 살고 있는 집 자체는 넓어서 좋다만, 내겐 그저 칙칙한 아파트뷰이고 나가도 높은 빌딩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서울 특'에 좀 부합한다. 답답해서 자꾸 비행기표 보게 된다는 뜻이다. 자고로 롯데타워는 런던의 더 샤드를, 더 샤드는 롯데타워를 생각나게 한다. 둘 중 뭘 봐도 노스탤지어가 자극된다. 그래서 잠실 집에만 살아도, 해외 나가고자 하는 욕구가 줄 것이다. 남들은 다 부러워할 지금 여의도 집이 내 마음에 쏙 들었으면 그렇게 눈 돌리지 않았다. 어차피 해외 나가도 불만족해하면서, 나는 이 충동이 쪼금 힘들다. 더 샤드를 똑 닮은 롯데타워가 큰 도움이 될 거 같다. 그토록 가고 싶은 런던에 사는 것처럼.


원래는 월세를 똑같이 달라고 하시더니, 이제는 내가 살 생활비만 있으면 된다고 바뀌었다. 오호라...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면 사는 게 맞다. 물론 이 집에서 나가면, 식비를 내가 벌어야 한다. 지금은 엄마가 마켓컬리로 다 시켜준다. 집에 냉장고도 겁나게 많아서 냉장고들 뒤지면 먹을 게 당연히 나온다. 혼자 살면 냉장고 뒤져도 먹을 게 안 나오고 툭하면 배달시키는 거 내가 다 봤다. 그러다 보면 식비 엄청 나온다. '배달 음식 좀 줄여야지' 그거 절대 안 지켜지는 거 봤다. 영국 가기 전에도 자취를 했었기 때문에, 다 합쳐서 혼자 살아본 경험이 3년 좀 안 된다. 한 달에 100만 원은 쓴다. 영국에선 170만 원 정도...


문득 내가 정서적으로 '기본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려면 돈이 상당히 많이 든다는 걸 또래보다 상당히 늦게 깨달았단 거 떠올랐다. 전남친 때문이다. 나한텐 뭔가 잘해줘야 할 거 같은 압박감을 느낀다고 했다. 개뿔 물욕이 아예 없는 사람인데 그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흔히 여자친구 선물로 준다는 반지, 목걸이, 가방, 옷 이런 걸 다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말이 아니다. 집안의 경제적 수준이 많이 차이가 나니까 밥 한 끼를 먹더라도 눈치가 보였던 거 아닌가 싶다. 왠지 얘는 편의점 아이스크림 안 먹고 하겐다즈 먹을 거 같은 그런 건가. 사실 맞긴 하다. 영국에서 하겐다즈 맨날 구비해 놓고 먹었다. 그 물가 비싼 영국에서도 먹을 거 살 때 가격을 잘 안 봤다.. 어차피 내 입으로 다 들어갈 거고, 필요한 거 사는 건데 해서. 이제와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먹는 것처럼 하루에 두유를 1-2개씩 꼭 먹었는데, 그럼 한 달 두유값만 10만 원 넘게 썼다. 한 달에 한인마트에서 30만 원씩 시켜드신 거 같은데도, 영국에 먹을 거 없어서 힘들었다고 징, 징, 징. 도착해서 뭘 먹어야할지 모를 때나 살 빠졌지, 그 뒤론 안 빠졌다.


그래서 가끔, 불안에 휩싸인다. 내 경제관념을 보아하면 돈 많이 벌어야 할 거 같은데, 지금까지는 집안의 도움이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 괜히 이 글 썼다가 불안에 휩싸였다... 원체 집안 식구들이 나 빼고 명품을 두르고 다녀서, 내가 생각하는 '기본'조차도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사치일 수도 있다. 근데 어차피 식비다. 아무리 식비가 안 들어도 그렇지, 이번 달 2주 동안 만 원 밖에 안 나갔다. 거기서 교통비 3-4만 원, 알뜰폰 요금 만 원 나가면 끝이다. 그러니 갑자기 휙 마카오를 갈 정당성이 부여 된다..


그 집 생각하니 갑자기 영국 생각이 났다. 구린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기 참 싫었다. 화장실 물도 안 내리고 엉덩이만 떼어도 절로 내려가는 걸 처음 경험했는데, 영국은 비데도 없었으니까.


집이 영원히 내 것이었으면 싶었다. 물론 영원히 내 것이 되진 않겠지만, 일단 들어가서 살 거다. '살고 싶다'라고 썼다가 '살 거다'라고 고쳤다. 앞으로 몇 달 뒤면 나도 한 달에 100만 원은 벌게 될 거다. 그럼 올해 미니 앨범 발매에 이어, 꿈 리스트가 하나 또 달성된다. 무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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