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술을 마시려면 둘 중 하나다. 일본인 언니가 오거나, 영국인 오빠가 오거나. 오빠는 다음 달에 온다고 했는데, 불투명해졌다. 올해 한 번도 안 왔다. 대신 언니가 다음 달에 또 온다. 규현씨가 뮤지컬해주는 덕분이다. 오늘도 규현 솔로 콘서트 때문에 한국 왔다. 나도 가고 싶었는데 티켓팅을 늦게 알아서 자리가 없었다. 유일하게 10년 넘게 좋아하는 연예인이 규현이다.
10년 전, 내가 슈퍼주니어 예성 카페에서 말 걸어서 알게 된 언니다. 고등학교 선생님들과 더불어 가장 오래 알고 지내는 사람이다. 나이 차이가 오빠보다도 더 많이 나서, 친구라고 부르긴 좀 어렵겠다. 오빠가 신부님 같은 존재이듯, 이모 같은 존재랄까.
지난달에 언니가 약속을 1시간 넘게 늦어서 엄청 짜증내는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ADHD의 말은 제발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된다. ADHD 특성을 모르면, '그래도 그 사람도 다 좋은 점이 있는데 섣불리 손절하지 말라' 같은 말을 한다. ADHD는 있는 그대로 그때그때 감정을 분출해서, 필히 하는 말을 걸러 들어야 한다. 살면서 오빠만 그게 되는 걸 봤다. 내가 하는 말 80%는 걸러 듣는다고 했다.
오늘 언니는 규현 콘서트가 끝나고 시간이 된다 하여 만났다. 밤 9시에 집 밖을 나섰다. 그럴 일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9시가 아니라, 해 떨어지고 나갈 일이 없다. 원데이 클래스나 강연을 들으러간다고 한들, 해 떨어지고 나가야한다면 아예 신청을 안 한다.
그래서 집 밖을 나서는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패딩 입고 이렇게 나와 있으니까 뭔가 연애하러 가는 느낌이네.' 그럴만 하다. 앞서 말한대로, 저녁 때 나갈 일이 없다. 2024년 겨울은 거의 집에만 있었고, 2023년 겨울은 영국에 있었고, 2022년 겨울엔 한 달 연애를 했다. 공교롭게도 전 연애도 11월, 전전 연애도 2020년 11월이었다. 대단히 일리가 있는 기시감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어떻게 크리스마스, 새해, 발렌타인데이 한 번을 남자친구가 없었을 수 있는지 유감이다.)
언니랑 헤어지면서 슬픈 생각이 들었다. 난 언제까지 이렇게 술 마시려면 외국어를 해야하지. 이 쯤 되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럼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되지 않냐고 할 거다. 정확히 그 말 들을까봐 만나고 싶지가 않다. 설명하기 싫어서. 오늘 글도 참 설명이다. 마음 같아선 앞으로 나를 만날 친한 친구나 애인은 브런치 글을 200개쯤 읽은 뒤 날 대해주면 좋겠다. 하지만 정녕 내 사람이면 그럴 필요 없단 거 다 안다. 병원에서 얘기해줬다. 사람들이 자꾸 질문 연달아해서 대화 아예 하기 싫게 만든다 얘기하니, 그 사람들이 잘못한 것이며 내가 지능이 높아서 그렇다고 했다. 앞으로 만날 사람은 어련히 오빠처럼 지능이 높겠지.
소개팅을 많이 했던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액땜을 심하게 했다. 처음 만나는 누군가와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심하게 다치기까지 했다. 넘어져서 이틀을 못 걸었다. 살면서 넘어졌다고 그렇게 심하게 다쳐본 적은 처음이었다. 난 그게 오히려 이제 감사하다. 물론 다치지 않았어도 나쁜 사람이란 걸 알았겠지만, 그 또한 하늘이 주는 신호였다. 그래서 1월에 그 낯선 사람과 술을 마시고 크게 몸도 마음도 다친 이후로, 사람을 끊었다. 그때 이후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누군가랑 술 마셨다.
언니랑은 1시간 만나고 헤어졌다. 하이볼 한잔만 마셔도 졸리고 힘들다. 영국에 있을 땐 오백 한 잔도 잘 마셨는데. 원래 주량이 맥주 한 캔이다. 영국에 있을 땐, 자주 마시다보니 이례적으로 늘었다. 주량이란 게, 마신다고 느는 게 아니라 익숙해지는 거라고 들어서 다시 돌아갈 거 알고 있었다.
영국이 그리울만 하다. 비록 그렇게 일주일에 한두번씩 같이 펍 가던 친구를 손절했더라도, 가면 오빠가 자기 친구들을 소개시켜주고 자연스러운 자리를 만들어줄 걸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랑 술 마시고 싶단 생각을 많이 했는데, 마셔보니 알겠다. 슬픈 생각 나는 거 보니, 영 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