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115
이래서 드라마도 연애 나오는 거 안 보려고 했는데. 중국 드라마라도 보면서 중국어 실력을 유지해야겠단 생각에 넷플릭스를 켰다. 여주인공이 술에 취해 남주인공에게 술주정 부리고 업히는 장면에서 울컥했다. 난 누군가에게 술 마시고 기대본 적이 있던가.
영국 이후론 한국에 친구가 한 명도 없고, 낯선 사람 만나고 다니는 걸 최대한 안 하려 했기 때문에 술 마실 일이 없었다. 영국 가야 마셨다. 그렇다면 유학 중에는 취해봤나? 없다. 알딸딸한 상태까지밖에 못 마셨다.
걔랑 그렇게 된 이후로 술 마시고 알딸딸한 상태까지도 안 가본 거 같다. 그것도 다 하늘의 계획처럼 느껴진다. 지난 1년 반 동안 한국에서는, 마음의 문을 닫았다가 잠깐 열면 이상한 사람 들어오고, 좀 지나서 다시 열면 또 들어오고 반복만 했다. 마치 드라마 속 저런 장면을 보면, 2년도 더 지난 과거의 장면만이 생각나도록.
빛이 있어서 무섭지 않은 시내에서 기숙사까지 걸어서 7-10분은 걸렸다. 그 정도면 굉장히 가까운데, 문제는 그 거리는 걸어도 걸어도 무서웠다. 공원 옆을 지나서 가야 하기 때문이다. 밤에도 차가 지나다니긴 하지만, 사람은 거의 안 걸어 다녔다. 차가 지나다닌다고 안 무서운 게 아니다. 서울과 다르게, 거긴 간판들이 없다. 가게 문이 닫았어도 간판이 삐까뻔쩍하게 좀 있어야 되는데, 컴컴했다. 영국 공원은 밤에 들어가는 건 아예 상상도 할 수 없고, 근처에 있기만 해도 컴컴해서 싫다. (창원 몇 번 가본 이후로, 이건 여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내가 강남에서 자라서란 걸 매우 느꼈다. 마산도 무섭다.)
두 달 정도를 밤에 밖에서 집으로 들어올 때마다 전화했던 애가 있었다. 분명 난 영국에서 알딸딸한 이상으로 가본 적이 없다. 항시 교수님한테 바로 영어로 이메일 오타 없이 보낼 수 있을 상태였다. 내가 안다. 그런데 나에게 남아있는 기억이 있다. '나 지금 되게 술 취한 목소리 나네. 에? 나 지금 목소리 되게 귀엽게 들릴 텐데. 얘 왜 극혐 안 하냐. 남사친이면서.'라고 생각했던 날이 있다. 취한 척 꾸며냈다고 말하기도 그렇다. 있는 그대로 다 편하게 풀어졌던 거다. 걔가 만약에 "야 니 왜 귀여운 척하냐. 개극혐이다."라고 했으면 "어 그래 음. 정신 차렸다."하고 교수에게 이메일 쓰듯이 할 수 있었다. 알딸딸한 상태에서는 정신 차리라면 정신력으로 차릴 수 있고, 편하게 풀어지려면 풀어질 수 있다..
방금까지 영국인 친구랑 술 먹고 집 가면서 한국말하는 거였을 테다. 내가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영어는 모국어가 아니다. 그런데 내 마음 다 털어놓을 수 있고, 정신적 스승이었던 사람에게 한국말로 말하니까 얼마나 편안하고 든든하고 좋았을까. 그것도 남자인데. 비상 연락처였음은 물론이고, 번호도 외우고 있었다. 가끔씩 그 무서운 길 걸으며 생각했다. 내가 이 길바닥에 쓰러져도, 어떤 영국인이 내 핸드폰을 주워서 아무리 한국어를 몰라도 가장 최근 통화기록 보고 전화하겠구나. 내가 병원에서 눈 뜨면, 걔가 이미 보호자처럼 필요한 처리들을 다 해놓은 상태겠구나.
연애할 때, 그 연애 대상자들 말고는 달리 술 마실 사람이 없으니까... 어디 가서 술 먹고 애인에게 전화한 기억이 없다. 남사친 따위 키운 적 없다. 그러니 나는 그런 목소리로 편하게 남자에게 전화해 본 기억이 걔 말곤 없다. 과거 한국에 여자인 친구가 있던 당시에도, 나보다 상당히 어린 친구였기 때문에 내가 언니로서 좀 해야 했다. 한마디로 친구고, 애인이고, 누군가를 믿고 기대본 경험이 참 없단 걸, 이 글을 쓰면서도 깨우친다. (종종 브런치에 카톡 채팅 첨부하는 오빠 한 명 있지만, 1년 넘게 한 번도 못 보고 카톡만 가능하다.)
걔 자체가 아니라, 그런 나의 배경이 더 강화시켰단 걸 안다. 오빠는 그런 상황에 놓이는 것마저도 인연이라고 했다. 이건 아무도 뺏어갈 수 없는 기억이다. 목소리가 점점 흐려지는 것 같아서 겁이 나는데, 이런 글이 나올 때마다 다시 한번 각인시켜 준다. 정확하게 들은 말이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나는 건, 많이 흐려졌다. 작년 8월, 플래시백 현상이 멈춘 이후론 그렇게 됐다. (다른 말로 하면, 작년 8월까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생생하게 기억나는 말들이 대따 많았다.) 그렇다한들, 내가 느낀 마음 자체가 흐려질 순 없다.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더 소중히 하고 싶다. 누가 뭐래도. 내 안의 목소리가 뭐래도.
'걔가 그냥 외로웠던 거지. 한국에 친구 없고, 영국 가니 많아진 건... 너고. 보통 유학생은 너랑 반대잖아. 여자친구는 영국에 없으니까 상황 잘 모르니까 위로가 되지도 않는다는 소리도 했어. 오빠 말대로 내가 그 결핍을 채워준 거야. 걔가 지금도 결핍이 있었으면, 날 찾았겠지. 안 찾잖아. 날 손절할 때 내가 필요할 수 있지 않냐고 매달리니까 절대 그럴 일 없다고 화냈잖아. 걘 이제 기억도 잘 안 나는 과거야. 나만 생생해. 난 친구고, 애인이고, 그런 따뜻함을 받아본 데이터가 처절할 정도로 없으니까. 걘 그렇게 사람 챙기고 다니는 게 아주 일상일 걸?'
라고는 내가 이미 내 스스로에게 많이 한다. 남이 해줄 필요 진짜 없다.
아. 제발 마음 놓고 술 마셔보고 싶다. 술 마시고 싶단 말로 대신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