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급하면 실수한다. 영국에서도 집 가고 싶어서 환장하게 피곤할 때, 기차를 거꾸로 탔다. 주의력 결핍인 걸 우째.. 더 조심해야지.
저녁이 생각보다 늦게 나왔다. 야경 투어 버스는 제시간에 못 가면 그냥 티켓 값을 날리는 것이기 때문에, 15분 전에 도착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10분 전에 도착했는데, 그 과정이 가관이었다.
식당에서 계산하자마자 뛰었는데 글쎄, 가디건을 두고 나왔다. 한식당인데 내일 찾으러 가도 되지 않을까 생각이 2초 들었으나 밤에 2층 버스라 가디건이 필요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바람이 장난 아니게 불어서 꼭 필요했다.) 가디건을 챙겨 버스 정류장으로 뛰었는데, 4일 동안 아무도 나에게 먼저 말 건 사람이 없는데 영어가 서툴러 보이는 노부부가 말을 걸었다.
지도를 손에 들고, 록스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나랑 같은 버스 타면 된다고 했다. 버스에 타서는 이탈리어로 "그라찌에" 하셨다. 오 아는 말. 근데 내가 아는 다른 이탈리아어는 "본 조르노" 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그건 아침 인사고 지금은 다르다고 하셨다. 스페인어, 불어, 다 잘하게 되면 7번째 언어로는 이태리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참 날씨 복을 받았다. 분명 밥 먹으러 호텔 밖을 나섰을 때는 비가 세게 왔다. 그런데 밥 먹고 나와서 투어 버스 타려고 하니 비가 그쳐 있었다. 하루 종일 필요할 때는 비가 딱딱 그쳐줬다.
파리에서도 아무 데도 못 가겠을 때 빅버스를 탔고, 본머스에서도 하루 종일 못 걷겠고 버스 투어만 2번 탔었다. 이런 건 보통 24시간 횟수 제한 없이 내렸다 탈 수 있다.
나이트 투어 버스는 처음이었는데, 앞으로도 이용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밤이야말로, 제일 힘 빠졌을 때다. 자유롭게 내렸다 타는 버스가 아니고 한 번에 쭉 도는 거라 티켓 값도 더 저렴했다. 빅버스 앱을 깔면 어느 도시에 있는지 알 수 있다. 프라하, 로마, LA 전부 가 본 도시인데 빅버스를 그땐 몰랐다. 특히 LA는 대중교통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여서 택시비가 많이 들었다. 다음에 가면 타야지.
어두컴컴한 공원들을 지났다... 영국 생각이 났다. 이런 컴컴한 공원은 영국에서만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시각과 후각 자극이 과거 생각나게 만들었다. 여기 공원은 가로등이 더 많고, 밝다. 영국은 인간적으로 밤에 공원에 들어가는 행위는... 여자면 하면 안 된다. 저 여자가 내 원수라도, 같이 걸어주게 생겼다. 어디 공포 영화에서 갑자기 입 틀어 막혀서 끌려가기 좋게 으슥하다.
내일은 펍 공연 끝나면 바로 호텔로 갈 거라, 오늘이 야경 구경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빅버스 덕분에 편안히 구경해서 참 만족스러웠다. 몰랐는데 버스에서 내려서 사진 찍는 시간도 있었다. 사진을 열심히, 잘 찍어주는 미국인 모녀를 만나 즐거웠다. 난 백인이 대체로 사진을 말도 안 되게 찍는다는 상당한 데이터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빛 때문에 잘 안 나온다며 여기 서보라는 제안을 했다! 그런 백인이 있던가. 감탄했다. 사진 찍어달라는 말을 하면, 자연스럽게 내가 말을 더 걸 수 있다. 그래서 그 후로는 그들의 뒷자리에 타서 얘기하며 갔다. 백배로 좋았다. 역시 난 누구를 만나 대화하느냐가 순간순간 참 많이 바꿔놓는다.
본다이 비치부터 야경 버스 투어까지, 참 괜찮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