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집

by 이가연

영국 살 때, 기숙사 방에서 걸어서 10분이면 밀크티집이 있었다. 일주일에 세 번은 거기서 밀크티를 사 먹었다. 그전까지 한국에서 26년 살면서, 직원 얼굴이 기억날 정도로 단골 식당이나 카페가 있어본 적이 없었는데 신기했다.


지금도 사우스햄튼 갈 때마다 찾는다. 특별히 요즘 밀크티를 먹는 것도 아닌데, 거기선 참 좋아했다. 원체 보라색을 좋아해서 한국에서 커피빈을 좋아하듯 보라색 간판이 좋았을 수도 있고, 어쩔 땐 케이팝 플레이리스트가 매장에 울려 퍼진 것이 좋았을 수도 있다. 물론 밀크티가 입맛에 딱 맞았다. 늘 갈 때마다 같은 오리지널 아이스 밀크티를 주문했다.


옆방 소음 때문에 쫓겨나듯 집을 나올 때면 저녁엔 항상 거기로 향했다. 낮에는 다른 근교 도시를 가거나 학교를 가면 되었지만, 저녁엔 마땅히 갈만한 곳이 없었다. 거긴 카페임에도 꽤 저녁 늦게까지 영업했던 기억이 난다. 영국은 펍이 아닌 이상 카페는 일찍 문을 닫는다. 다들 주로 테이크아웃을 해서 평일엔 손님이 거의 나 밖에 없었다. 거기서 책도 읽고, 브런치 글도 쓰고, 가끔은 친구와 수다도 떨었다.


때론, 대체 이 저녁 시간에 내가 왜 밖에 나와있어야 하는지 화도 나고 몸도 마음도 지쳤었다. 매장의 편안한 분위기와 맛있는 밀크티만이 나를 달래주었다. 집이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할 때, 마음의 집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여의도에 이사 오고도, 얼른 그런 아지트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밀크티집, Mayflower Park, 집 앞 공원 이 세 가지가 소튼에서 나를 버티게 해 주었는데, 지금은 집 앞 서점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여기가 이제 나의 새로운 '밀크티집'이다. 물론 밀크티는 없다. 카페도 겸해있는데, 한 번도 음료를 주문해 본 적이 없다.


도서관도 근처에 있지만, 서점은 신간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대신 여긴 평일에만 가야 한다. 주말에는 앉을자리가 없어서 벌써 두 번을 허탕 쳤다. 교보문고처럼 대충 아무 데나 바닥에 앉아서 책을 읽을 수는 없는 구조다. 책을 읽다 보면, 글 쓸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그럼 그때그때 메모하고 집에 와서 바로 글로 옮긴다. 요즘 브런치 글을 많이 쓴 것은 다 이 서점 덕이다.


영국에서처럼 실내 한 군데가 생겼으니, 이제 날씨가 풀리고 봄이 오면 산책할 실외를 찾을 차례다. 걸어서 15분이면 한강이 있지만, 사람이 많아서였는지 정이 잘 가지 않았다. 그래도 명색이 여의도이니, 분명 근처에 힐링 스팟이 있을 거라 믿는다.


마음의 안식처는 내가 만들기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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