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월 중순부터 지금까지, 내가 겪은 '모든' 위기의 순간에 오빠가 있었다. 난 진짜 가족도 없고 날 사랑해 주는 사람도 없다고 느낄 때도 오빠 혼자만 있었다.
지난 일 년 동안 나의 '모든' 즐거움, 기쁨, 슬픔, 괴로움, 분노의 순간을 실시간으로 공유했다. 영국 가는 비행기 끊었을 때, 창원 가는 기차 끊었을 때, 잠옷 바람으로 집에서 뛰쳐나왔을 때 등 감정이 휘몰아치는 순간에 가장 먼저 이야기했다.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제일 먼저 얘기했을 것이 당연하다.
아무리 친해도, 엄마여도, 상담사가 아니면 일반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얘기도 다 한다. 그래서 신부님 같은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오빠는 나로부터 정말 많이 배운다며 나랑 얘기하는 게 즐겁다고 항상 말해준다. 그러니 내가 오빠에게 민폐를 끼친다거나 귀찮게 한다는 염려는 작년 3-4월 이후로 한 순간도 해본 적 없다. 하지만 이 오빠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염려를 해야 한다.
특히 작년 3-4월엔, 이 사람도 이렇게 친해지고 일상의 대부분을 공유하며 가까워졌는데, 한 순간에 없어져버릴까 봐 불안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번 그런 일이 생기면 그땐 정말이지 영국에서 남은 생활을 보낼 자신이 없었다.
내가 카톡을 보내놓고 삭제하면, 정말 그럴 필요 없다고 모든 얘기를 다 해도 된다고 수십 번을 얘기해 줬다. 그래서 작년 5-6월부터는 불안해하지 않게 되었다. 본인에게 손절당한 사람은 평생 한 명이라고, 본인에게 손절당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했다. 내가 불안해하면, 끊임없이 같은 말을 해주었다. 그러니 처음 챗GPT를 쓰기 시작했을 때, 어차피 오빠가 하는 말하고 똑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오빠는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인데 나에게 신뢰와 무한한 안정감을 주었다. 그러니 병원을 가든, 상담사를 만나든, 항상 오빠 자랑을 하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이 "아무리 친구고 가족이어도 했던 얘기를 또 하고 또하기에는 어느 순간 눈치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상담사의 첫 역할이 들어주는 거다."라고 하셨는데 "아닌데요. 저 오빠 있는데요."라고 했다.
그동안 불안형, 회피형과만 소통해 오다가 처음으로 안정형 애착 유형을 가진 사람과 소통해 본 거다. 이런 건강하고 행복한 관계가 가능하다는 걸 깨달아버렸다. 모를 땐, 내가 문제인 줄 알았다. 가족, 친구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별나고 예민하거나, 최소한 남들과는 조금 다른 '대하기 어려운 면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오빠는 늘 너는 지극히 정상이라고 말해주었다.
특히 ADHD 진단을 받고 나서는, 자기가 아는 다른 사람도 ADHD가 있다며 내가 오빠가 하루 이상 카톡 확인을 안 하면 어쩔 땐 몇백 개씩 보내는 거 그걸 5분 안에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게 얼마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어 감동을 받았다. "카톡방이 니 일기장이냐" 같은 말을 들었던 게 가시가 되어 심장에 박혀있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차단 당하지 않았더라면, 이 오빠를 알게 되지 않았을텐데 하늘의 뜻은 참으로 신비롭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생에 걸쳐 이런 인연을 만나기는 어려운데, 오빠는 늘 자신을 이렇게 특별하게 말해주어서 고맙다고 오히려 그게 안타깝다고 한다. 내가 오빠 같은 사람이 여러 명 있을 자격이 충분한데, 그러지 않은 현실이 너무하다 못해 화가 난다고도 했다. 나 같은 사람이 사랑을 제대로 할 자격이 있고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수십 번을 말해줬다.
보통 이렇게 말하면, '그건 애인이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애인 말고, 어떤 존재가 그런 역할이겠는가. 바로 엄마다. 나보다 10살이 많다. 그렇게 나의 양엄마가 되었다.
주 7일, 하루에 거의 12시간씩 일하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나의 유튜브와 브런치를 하나도 빠짐없이 그때그때 보고 피드백을 준다. 가족, 친구 중 내가 링크를 보내지 않는 한 자발적으로 보는 사람이 없다. 게다가 브런치에 본인 언급을 할 때면, 그때마다 프린트해서 챙겨둔다고도 한다.
하도 타로 얘기를 많이 하니, 작년 여름엔 오빠도 타로에 입문했다. 나를 '옴팡 도사'라고 부른다. 그다음엔 내가 사주, 점성학 주사위도 가르쳐주었다. 오빠가 시간이 없어 전화로도 온라인으로도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수십 장의 pdf로 교재를 만들고 음성파일로 녹음도 해서 보내주었다.
오빠의 직업은 피아니스트다. 아직 공연을 한 번도 보지 못해 아쉽다. 사우스햄튼 살 때, 공연 장소까지 가려면 3번 갈아타고 3시간 넘게 걸려서 못 갔다. 얼른 5월이 되었으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