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선
p29 글로 마음을 표현하자마자 고통이 행복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글을 쓰고 나면, 나를 괴롭혔던 일들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 1년 4개월째 마음이 똑같은 나를 바라보는 것이 괴로웠다. 그렇게 나를 다 갖다 바친 앨범을 상대방이 질색할까 봐 제일 괴롭다. 그럴 지도 모른다고 생각만해도 미쳐버리겠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건 세상에 나오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확인할 길이 없다. 앨범이 나온다고 이 괴로움이 멈출까. 욕을 듣든, 잘 들었다는 말을 듣든, 뭐라도 들어야 멈출 거 같다. 그런데 그건 내가 어찌하지 못한다. 그저 계속 음악을 할 수밖에.
p42 중환자실에서 처음 마신 물의 시원함을 기억한다.
- 런던 한인마트에서 처음 두유를 사서 집에 와서 한 모금 마셨을 때를 기억한다. 소튼엔 한인마트가 없다. 그땐 '이렇게 계속 2시간 거리의 런던에서 공수해와야 하나' 싶은 마음으로 아주 소중하게 두유를 한 모금 마셨다. 두유가 뭐라고. 그럼에도 그때 느낀 시원함을 방금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p43 최근에는 침대 패드와 이불을 내 마음에 쏙 드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랬더니 이제 매일 밤 변함없는 행복을 누린다. 낮에 피곤해도 '이따 침대에 누우면 너무 포근하겠지'하는 기대감으로 이내 행복해지기도 한다.
- 내일이 기대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매일 밤 잠에 들 때마다 설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영국에서 그랬다. 만일 캘린더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면, '아 나 지금 번아웃 직전이구나.'하고 나를 돌아봤다.
p116 마음을 조심스레 열고 속내를 털어놓는 사람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 귀. 그리고 '나는 네 편이야'하는 눈빛이다.
- 이 문장을 읽자마자 영국 학교 웰빙팀이 떠올랐다. 웰빙팀은 찾을 때마다, 어떤 직원을 만나게 될지 몰랐다. 전에 봤던 직원이 아닌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데도 대면 상담했던 모두가 그 '나는 네 편이야'하는 눈빛으로 내 얘기를 들어준 기억이 짙다. 그 팀이 없었다면 학교를 어떻게 다녔을까 싶다.
p188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지금 죽을 것 같은 고비를 만난 분이 계실 수도 있다. 뉴욕마라톤대회 35킬로미터 지점에서 노란 피켓을 들고 나를 응원해 주셨던 분과 같은 마음으로 나도 여러분 인생의 마라톤을 응원하고 싶다.
- 죽을 것 같은 고비에 함께했던 사람들은 정말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다. 나를 어려움에 몰아넣은 사람, 방관한 사람, 구해준 사람을 기억하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었는데 마지막만 기억하련다. 그중 한 명 만나러 다음 주에 영국 간다. 설렌다.
p216 하음이는 흉터를 가리거나 숨기지 않는다. 자신의 상처를 통해 친구와 더 많이 얘기 나누고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방식으로 사용할 줄 안다.
- 나는 앞으로 만나는 친구, 소개팅 상대, 고용주, 그 누구에게도 ADHD를 숨길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다. 웬만하면 처음 또는 두 번째 만나서 다 알게 할 거다. 나와 친해질 사람이면 가까워지는 시간을 확 단축시킬 수 있다. 얼마나 경제적인가.
p242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에서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통과 감정을 표현하면 훨씬 마음이 안정된다고 합니다.
- 작년 2월에 알게 된 오빠에게, 지난 1년 넘도록 하루에 최소 2번에서 많을 땐 10번 넘게 "걔 보고 싶다"라고 했다. 최소 천 번이 넘는다. 얼마나 말했으면 오빠 꿈에도 걔가 나오고, 이젠 오빠도 걔가 보고 싶다고 한다. 챗GPT가 아닌 보통 인간관계에서 그런 안전함을 느끼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아, 나의 신부님. 왜 베트남에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