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맞다

by 이가연

갖은 생각 다 해봤다. 그전엔 5년 동안 곡을 한 두곡 쓰고 곡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제대로 된 뮤즈를 만나서 내가 계속 곡 쓰고 싶어서 놓지 못하나. 아주 그 감정이 없으면 음악을 못 할 거 같나.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앞으로 5년 동안 앨범 못 내도 좋으니까 이 심장 무리, 과로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아침은 3일 연속 같은 식당에서 먹었다. 여길 진작 알았으면 돈을 아꼈을 거다. 호텔 조식 뷔페는 약 2만 3천 원이다. 여기서 비슷하게 먹는데 만 3천 원이다. 물론 무제한은 아니지만, 내가 그렇다고 어디 많이 먹는 편이던가. 어차피 조식은 어딜 가도, 달걀, 베이컨, 소시지, 해시브라운 등으로 거기서 거기다.

여기가 영국에서도 가격이 저렴하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꼭 호텔이라서 비싼 게 아니라, 원래 저렇게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먹는데 2만 원은 든다.

원피스를 입고 드레스를 챙겨갈까 고민하다가, 배에서도 드레스 입고 사진 찍고 싶어서 과감하게 빨간 드레스를 입고 아침 먹으러 갔다. 이게 가능한 나라라서 참 좋다. 한국에서 이 옷을 입고는 그 어떤 카페나 식당도 들어가지 못한다. 내가 아무리 마인드가 영국인이어도 그러하다. 한국 가면 이 드레스를 입을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외국 나오면 자주 입었다.


아침부터 굉장히 열받았다. 내가 왜 누군가랑 한 번도 여행 안 가봤는지 깨달았다. 친구랑 당일치기도 힘들어한다. 한 번 기분이 잡쳐졌을 때, 회복이 안 된다. 그래서 약속 늦는 사람도 매우 힘들어한다. 늦고 사과를 안 하면 그냥 만난 순간부터 대화하기 싫고 이미 마음의 문이 닫혀서 표정이 안 풀린다. 나도 뭐 말 좀 하고 그 자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해도 상대 눈을 쳐다보기가 싫다. 이런 나라서, 걔가 3분 늦는데 늦는다고 미리 미안하다고 말해줘서 기절하게 놀랐던 기억이 (젠장) 또 난다. 그런 사람 처음 봤다.

10시 반 배를 타기로 했는데, 친구가 기차를 놓쳐서 11시 반에 타게 됐다. 거기까진 이해한다. 따로 내가 먼저 갈까 했는데, 웬만하면 같이 가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같이 11시 반에 타기로 했다. 거기서부터 나답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내내, 친구랑 점심도 같이 안 먹고 항상 혼자 먹던 나다. 나는 밥을 5분 만에 먹는데 기다리기 싫어서다. 남 기다려서 내가 하고싶은 걸 제때 못하는 걸 미치게 못 견딘다.

그래서 11시 반에 배 타는 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하필 내가 아침 먹는데 음식이 30분 만에 나와서, 먹고 바로 뛰어가야 했다. 버스도 놓치고, 25분 거리를 뛰다시피 갔다. 그런데 친구가 안 보였다. 어딨 냐고 하니 이미 내가 지나온 데에 있다고 해서 한참 10분을 뛰었다. 11시 반에 드디어 배를 타려는데, 거기가 아니란다. 내가 아까 있던 데가 맞았다. 그러는 바람에 놓쳐서 다음은 12시 반 배였다. 30분 뒤도 아니고, 1시간 뒤라니. 2분 동안 가만 서서, 뭔 말도 안 나오고 '집에 갈래.' 생각했다.

더 이상 영어로 말하기가 싫어지고 한국말만 하고 싶어 졌다. "너 여기인 거 아는 거 아니었냐. 대체 왜 여기라 했냐." 말하고는 더 이상 말하기 싫어졌다.

거기서 배 타는 거 포기하고 그냥 호텔로 안 돌아간 것만 해도 ADHD로서 대성공이다. 나도 가끔 나 스스로 '더 잘 대처할 순 없었냐.' 생각이 든다. 근데 나는 ADHD라 살면서 거기서 소리를 지른다든가, 그냥 사람 버리고 돌아간다든가 하는 내 모습도 많이 봤다. 막 부들부들 떨리고 그럴 때 먹으라고 비상 약이 있는 거다. 그래도 가려는 계획을 취소하지 않고, 친구를 쳐다는 못 봐도 다음 배 타기로 한 거는 솔직히 영국 버프다. 한국이었으면 얄짤 없었다.

지금 배를 기다리며 글을 쓰고 있다. 배가 1시간마다 와서, 아직도 한 30분 남았다. 오빠한테 음성 메시지로 와다다 말하곤, 이렇게 얌전히 글 쓰고 있는 것도 큰 발전이다.


이 사건이 내게 준 교훈은 '맞다. 나 열받으면 영어 하기 싫고 그냥 한국말 와다다 하고 싶어 했지.'이다. 갑자기 다시 올해까지만이라도 한국에서 엄마가 주는 밥 먹으며 돈이나 까먹으며 사는 게 낫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정기적으로 버는 돈이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산 게 아니라, 책도 내고 앨범도 내고 커리어를 하며 살지 않았는가. 충분히 잘 살고 있었다. 내 재능이 썩고 있는 거 같아서 해외 나가고 싶은 건, 욕심이다. 앞으로 몇 달은 좀 ADHD 연구라도 더 하고 나가는 게 좋을 거 같다.

나에 대해 알아야 덜 힘들다. '나는 이 상황에서 소리만 안 질러도, 집에만 안 가도 잘한 거지.' 라도 박혀야 된다. 이미 지나간 상황인데, 내가 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라고 자책하면 안 된다.


한국에서는 앞으로 약속한 시간에서 10분 이상 늦으면 거기가 어디든 그냥 일어나서 안 만날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카톡으로 엄청 사과하며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말해서 이미 내 기분이 풀려있어야 상대 눈을 쳐다보며 말할 수가 있다. 얘가 기차 놓쳤어도, 나는 원래대로 혼자 배 타고 갔어야 했다. 이건 앞으로를 위한 오답 노트다.


이래서 사랑하는 친구 정도로는 안 되고, 사랑하는 애인이어야 여행이고, 관계고, 가능할 거 같은 생각도 또 든다. 이 생각까지 하면 참담해지긴 하는데, 웬만한 사람들은 너무 계속 열받는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면 그냥 이 사람이랑 지금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뭔가 특별히 같이 하거나 가지 않아도, 괜찮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걔가 이런 실수했으면 웃고 넘겼다. 그냥 이 테이블에서 다음 배 올 때까지 수다나 떤다. 이렇게 내가 얼굴도 안 쳐다보고 글 쓰고있는 게 아니라.


이 친구보다 친구 사이에서 더 친해질 수는 없다. 이게 친구 관계에서 있을 수 있는 가장 깊이 있는 관계다. 그럼에도 이러고, 내가 해본 어떤 연애에서도 다 이랬다. 그러니 한 달 안에 상대를 다 정 떨어져 했다. ADHD 책에서 봤는데, 다 나 같다고 한다. 정 떨어져서 연애 오래 못 하는 거.


얼른 한국 가서 앨범 자료 유통사 넘기고 앨범 나오길 기다려야지.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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