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도시 공학 쪽에서 일하고, 지금 남자친구를 2년 차단했었던 것만 공통점이 아니다. 내가 '어떻게 앨범 하나가 나올 수가 있을까' 하며 열변을 토하자, 그 남자친구도 친구 때문에 노래를 만들었었다고 했다. 그 남자친구랑 만나서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 당시 어떤 심경이었는지부터 들어보고 싶다.
바로 옆에 있는 케이스 보고 좀 더 버텨보라는 신호인가. 누군가의 연애 스토리를 접할 일 자체가 근래 없었다. 2년. 그땐 한국 떠야지..
개트윅 공항에서 콘센트 찾아서 핸드폰 충전하려 해도 아무 데도 충전이 안 됐다. 남은 배터리 37%. 신문 챙겼다.
내내 휴대폰 끄고 신문 보다가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영국 노동 시장이 근 몇 년 사이 최악이고, 이민자들에게 요구되는 영어 레벨이 올라갈 거며 고급 인력이 아닌 이상 워킹 비자받기도 어려워질 거라는 내용이 기억에 남았다. 이민자 관련 기사가 1면에 큰 글씨로 쓰여있어서 인상 깊게 보고 가져온 거였다. 역시 영국은 안 살 거다.
밤 10시 45분. 공항에 다행히 버스 기다리는 사람은 많았다. 버스 타고 바로 호텔 앞에 딱 내리면 좋겠지만, 내려서 5분은 걷고 전철로 갈아타야 했다.
도쿄도 아니고 위험한 선택이었다. 한 번도 이렇게 늦은 밤에 호텔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런던에서 파리 가는 비행기 중 선택지가 한정적이었다. 영국에 더 오래 있고 싶던 마음도 한몫했다.
세상에. 공항버스가 한참을 기다려도 안 왔다. 사람들이 슬슬 우버 타러 가기 시작했고, 이상함을 감지했다. 보라색 머리 옆 사람에게 말 걸어보니, 무슨 도로가 막혀서 버스가 안 올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오갔다. 이야... 밤 11시 반에.
급히 우버 알아보니 호텔까지 60유로였다. 돈은 괜찮은데, 이 여자와 함께라면 돈을 아낄 수 있을 거 같았다. 사람 모아서 같이 타고 가자는 얘기를 했다. 주변에 중국인들이 있었다. 그렇게 공항에 도착한 지 한 시간도 더 걸려서 중국인 둘, 보라색 머리 여자와 넷이서 오페라역까지 가는 우버에 탑승했다.
보라색 머리 여자가 계산했고, 중국인 여자는 현금으로 줬는데, 나는 현금이 없었다. 정말 다행히도 영국 계좌에 18.5파운드가 있어서 그걸로 1/4 보내줬다. 아슬아슬했다. 덕분에 택시비 몇 만 원은 아꼈다. 운이 좋기도 했는데, 뭔가 상황이 잘못 돌아감을 감지하고 주변 사람에게 말 건 게 잘했다. (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호텔까지 우버 탔어야 했다.)
분명 피곤해야 하는데, 도파민이 돌아서 별로 안 피곤했다. 원래대로 버스 타고 전철 타는 게 아니라, 모르는 여자 세 명과 택시를 타고 있다니. 이것이 여행의 묘미다 싶었다. 역시 ADHD인은 그런 상황에서 스트레스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재밌다.
문제는 핸드폰 배터리였다. 비행기에서 내내 핸드폰을 한 번도 안 켜고 신문 봤다. 5시간 동안 배터리 십몇 프로 쓴 거면 진짜 최선을 다해 아낀 거다. 보조 배터리를 영국에서 잃어버렸다.
택시에서 내려서 호텔까지 가는 방법을 외웠었다. 그런데 핸드폰도 꺼지고, 전철 막차도 끝나면 그냥 끝장나는 거였다.
12시 반이 넘어서 택시에서 내렸다. 한국에서도 이 시간에 밖에 있을 일이 없었다. 한 5년 합쳐야 손에 꼽힌다.
12시 45분. 전철에 올랐다. 한 번에 가려면 10분은 걸어야 했기에, 안전하게 환승해서 가기로 했다. 다행히 파리 지하철 내부는 밝아서 크게 안 무서웠다. 제발 전철 내려서 호텔까지도 안 무섭길 기도했다.
12시 55분. 배터리 25%. 환승했다. 이제 이 전철만 내리면 걸어서 호텔이었다. 새벽 1시에 아직도 호텔 도착을 못했다니. 돈 생각 안 하고 버스도 안 기다리고, 처음부터 우버 불렀다면 12시도 전에 호텔에 도착했을 거다.
사우스햄튼을 밤 11시에 도착했다면 도보 10분이라도 택시 불렀다. 그동안 유럽 치안 뭐가 걱정이냐고 부르짖어왔는데, 새벽 1시에 여자 혼자 파리 전철 타고 있는 건 안전불감증이었다. 160유로도 아니고, 60유로면 공항에서 호텔 앞에 내리도록 택시 탔어야 했다.
전철 타고 가면서 영사관 전화번호 외웠다. 보아하니 해외에서 위급상황시 연락하라고 번호가 문자로 와있었다. 혹시라도 휴대폰 도난당할 상황을 대비해 휴대폰에서 체크카드를 빼서 주머니에 넣었다. 카드라도 있으면 최소한 노숙은 안 할 수 있을 테니까.
역시 어떠한 경우가 있더라도 끝장나는 상황은 안 만든다. 영국 갔을 때는 한국인 두 명 번호를 외우고 다녔다. 비상 상황에서는 측면 버튼 여러 번 누르면 내 위치가 문자로 전송되게도 해놨었다. 그 둘과 끊기고는 영국인 친구로 바뀌었었다.
이런 두뇌 회전, 이게 ADHD다.
새벽 1시 25분.
호텔은 무사히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