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가연 Nov 15. 2023

곡인지, 마음인지, 허물인지

1년 9개월 만에 곡을 썼다.


마음에 쏙 드는 후렴이 툭하고 터지자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감격의 순간을 겪었다. 이제야 경험이 의미가 있어진 기분이다. 물론 곡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의미 없는 경험이 되는 것은 아니나, 소중한 무언가를 낳은 느낌이다. 내가 닭이고 알을 낳은 느낌 같달까.


자작곡은 참으로 날 것의 감정을 담아낸다. 그래서 소중하고 연약하다. 누가 '톡'하고 건드리면 터져버릴 것만 같은 무언가를 담아내고 있다. 내 안에서 제대로 소화되지 못한 감정이 분출된다. 그래서 내가 왜 이런 곡을 내뿜게 되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선뜻 곡을 들려주기 망설여진다. 친구와 울고 웃으며 아무리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어도, 곡으로 드러내는 건 내 안을 뼛속까지 속속히 보여주는 기분이다. 제대로 속에서 발가 벗겨진다. 그래야만 곡이 나올 수 있다.


내 자작곡의 원료는 대부분 나 스스로도 인정하지 못하는, 그래서 드러내지 못하는 강렬한 감정을 바탕으로 한다. 데뷔곡 'Rest In Peace'의 영감은 상대방에게 내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드러냈는데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한 상황에 있다.'기다림의 끝' 역시 좋아하는 사람의 연락을 매일, 하루종일 기다리며 자신과 상대의 마음이 다름에 슬퍼하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아하, 사랑에 있어 아픔을 겪으면 곡이 나도 모르게 휘리릭 나오는구나. 그럼 그럴 때마다 이 때다 하고 피아노 앞에 앉아야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본질은 아픔이 아니라 내면에 있었다. 헤어졌다고 하면 아픔을 예상할 수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 위로도 받을 수 있다. 2012년부터 지금까지 곡이 나왔던 순간들에는, 스스로도 내가 지금 왜 이런 걸로 슬퍼하고 있나 인정하지 못할 때 탄생했다. 본인 감정을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곡으로 나왔다.


공연 때 나를 '짝사랑 전문 가수'라고 소개한 적이 자주 있다. 연애 경험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헤어짐을 분명 겪어봤다. 물론 연애를 경험해 본 기간이 지극히 짧은 탓도 있다. 헤어지고 술 먹고 전화하고 싶고, 헤어진 지 일주일 이상 지났는데도 연락하고 싶은 감정이 뭔지 아직 전혀 모른다. 이별 상황에서는 단 한 곡도 나오지 못했다. 아무리 피아노 앞에 앉아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할 말을 상대에게 다 한 상황이기 때문에 곡으로 나올 재료가 없던 것이다.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한 말,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말,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 교감을 이루며 탄생. 그래서 곡을 쓰는 것이 아니라 토하는 느낌이다. 본인도 인지하지 못했던, 외면받았던 속마음이 가사로 나온다.



이번 곡은 맥주 한 캔 마시며 친구와 전화하다 갑자기 가사가 쓰고 싶어 져서 전화를 끊고 1절 가사를 써 내렸다. 그리곤 연습실에서 미리 써둔 가사에 멜로디를 붙여 탄생했다. 멜로디는 보통 10분 안에 탄생한다. 그렇게 불쑥 뱉은 멜로디를 다듬는 과정은 30분이든 1시간이든 마치 3분처럼 그 어느 때보다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곧 수업이라 연습실에서 나와야 하는데 곡을 다듬고 있느라 노심초사했던 기억도 난다.


이번엔 가사를 미리 써두고 멜로디가 나온 케이스지만 대부분의 경우 가사와 멜로디를 동시에 써왔다. 이렇게 가사를 미리 써두고 연습실에 가서 멜로디를 붙이는 방식도 괜찮은 것 같다.


강렬한 감정을 느껴야 곡을 토해내기에, 참으로 간헐적인 작곡가이기에, 그동안 '싱어송라이터'라는 호칭도 부끄러워 '뮤지션'이라 하곤 했다. 그런데 이틀 연속으로 한 곡씩 내뱉었고 그중 한 곡은 2절까지 완성하여 추후 음원 발매도 고려하고 있다. 참으로 감사하다.


좋은 곡이 나오면, 곡이 나와서 좋지만 이런 경험은 정말 다시 하고 싶지 않다고 중얼인다. 도무지 답이 없고 빨리 끝내는 것이 이득인 전쟁에서, 결과물을 내었다는 승리를 맛보다 가도 '나를 곡까지 쓰게 만드는구나'하는 좌절감도 피할 수 없다. 또다시 그래도 나는 뮤지션이라서 좋다고, 곡으로써 나를 위로하고 남들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 좋다고 다독인다.


작가의 이전글 자기 오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