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남자가 바텐더랑 한국어를 곧잘 하시길래 나도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그러다가 나는 티셔츠 가리키며 사우스햄튼에 있었다고 말하자마자 "와따 니 영어 하나." 같은 느낌으로 신나서 그분이 영어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치만 나는 '백인이라고 해서 영어를 할 거라고 지레짐작하면 안 된다. 한국말 잘하는 거 보면 한국어로 말하고 싶어 할 수도 있지 않나.'싶어서 먼저 영어로 말 걸지 않았다. 그게 맞는 거 같다.
처음 만났는데 두 시간이 넘도록 폭풍 수다를 했다. '고르다. 선택하다'는 같은 뜻인데 한자어가 왜 더 고급스럽고 공식적인 상황에서 쓰는 단어냐 슬프다.라고 외국인이 말하다니. 평소에 생각도 안 해본 일이다. 그 밖에도 'print'가 '출력하다. 인쇄하다. 뽑다' 이런 식으로 같은 뜻인데 여러 단어라서 어렵고 '누웠다. 눌렀다.' 이런 것도 빨리 말하면 알아듣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요즘 영어 수업 듣고 있다고, 고급에서 네이티브 레벨로 가기는 정말 끝도 없는 거 같다고 했다.
이 분은 10개국 이상 살아봤다고 하는데, 영국은 리버풀과 글래스고에 살았었다고 했다. 여러 나라에 사는 얘기를 하다 보니, 의료 시스템 얘기도 나왔다. 미국, 영국만 비교가 되기에 사실 나도 한국 보험이 최고인 줄 알았다. 폴란드는 그냥 다 무료라고, 2주를 입원해도 무료였다고 했다. 장단점이 있어 보였다. 나도 시야가 좁았다.
난 버스킹 하는 사람들 보면 말 걸고 싶어진다. 그 마음을 어찌 막을 건가. 나쁜 마음도 아니고. 근데 하나 같이 내가 가서 나도 싱어송라이터라고 말 걸어도, 내가 두 마디 만에 철수하고 지나간다. "네.", "아." 수준의 말 밖에 못 듣기 때문이다. 오늘도 두 번 말 걸었다가 상처받고 포기했다. (아니, 먼저 다가간 사람 생각해서 좀 밝고 친절하게 받아주지 도대체 한국인들 대다수가 왜 그러는가. 외국인들과 비교했을 때 너무 기절하겠다.)
한 번 그렇게 경계, 거부를 느끼면, 곧장 다른 사람에게 말 걸어서 만회하고 싶은 욕구가 주체가 안 된다. 그렇게 두 번 만에 접는 것도 이젠 필요하다. 이건 한 번 돈 잃고 또 도전하는 도박 수준이다.
이 폴란드인은 한국에 오래 살았지만 한국인 친구 한 명도 없다고, 별 말 안 했는데도 내가 무슨 말하는지 다 안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에게 말 걸어서 상처받은 썰조차 풀 필요 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내가 겪은 걸 어느 정도 잘 말해야 이해를 한다. 한국인이자 영국인인 오빠조차도 거듭 썰을 공유 해야 했다. 나도 기쁘고 설레고 행복했던 경험들 공유하는 것이 좋지, 팍팍하고 갑갑하고 슬픈 경험을 구체적으로 토로하며 공감을 바라고 싶지 않다. 이해시키기 위해서 썰을 풀어야 하는 행위가 매우 지친다. 말 안 해도 이미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 이래서 '한국에 사는' 외국인 친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래야 '내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 내가 ADHD라서가 아니구나.' 안심이 되지 않겠나. (ADHD는 거절 민감성이 높은 특징이 있다.) 늘 외국인 친구들과는 관계를 잘 맺어왔다. 영어로 말하면 '내가 이 사람에게 상처받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안 든다.
펍에서 무슨 손님이 나 혼자 한국인이었다. 한국인데 나 혼자 한국인이면, 내가 가장 행복해하는 상황 아닌가. 서울에도 분명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이게 내가 살 길이다. 어플 만남이든, 언어교환 모임이든, 그 어떤 모임도 나에게 통하지 않는다.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자리를 바로 뜰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난 바로 떠야 한다. 별별 핑계 대고 도망가는 스킬만 늘었다. 그래서 오늘 같은 '외국인 많이 온다는 펍에 혼자 앉아있기'가 최선으로 보인다. 외국인은 대화가 안 통할 가능성이 적고, 설령 안 통한다해도 부담 없이 자리를 뜰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폴란드 남자가 오늘 이 펍에 와서 참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또 '역시 말 걸어도 상처뿐인 거지 같은 한국'으로 이 밤이 기록될 뻔했다. 지난번에 광안리 왔을 때, 한 다섯 명 이상 말 걸고 전부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 한 사람과 쭉 이런저런 얘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