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섬주섬 명함을 꺼내 들고 누군가에게 건넬 때, 영국에선 늘 "한국에서 온 싱어송라이터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사우스햄튼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한국인이라는 거 자체가 특색이었다. 영어로 말을 잘 걸어오는 한국인, 그것 만으로도 충분하단 걸 알았다. 그래서 항상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인디 뮤지션인데요."라고 말하면서도, '나 같은 인디 뮤지션 한두 명이겠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 희한한 일이다.
오늘은 명함을 건네고 돌아서서 '와 나 진짜 뭐라고 한 거냐. 자기소개 완전 망했네?'싶었다. 일단 '한국에서 온 싱어송라이터'는 이제 통하지 않으니, 다른 첫 문장이 입에 배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에서 공부했고 글로벌 진출을 꿈꾸는'도 괜찮지 않을까.
사실 그 "엘리베이터 피치"를 망했더라도, 애초에 인디 뮤지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건넨 명함을 한 번이라도 읽어볼 것이다. 그럼 어느 학교를 나왔고, 외국어를 잘하는 등 다 적혀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관심 있는 사람이면 "인디 뮤지션인데요."만 해도 "오. 인디 뮤지션 좋죠." 하며 리액션을 바로 주기 때문에, 내가 자기소개를 망할 일이 없다.
기억해야할 것은, 이건 내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서슴없이 말을 걸고 자기 어필을 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다. 대학원 교수도 책 '영국에서 찾은 삶의 멜로디' 인터뷰에서, 내가 준 프로필 명함이 인상적이었다고 여전히 책상 위에 두고 그때의 열정을 느낀다고 했다. 나는 그러는 게 흔한 일이라, 그 교수에게 처음 말 건 순간이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그 교수는 나의 첫인상이 제법 강렬히 기억된 거다.
열에 아홉은 내가 아무리 예쁘게 명함을 만들었던, 얼마나 떨리는 마음으로 말을 걸었든, 버릴 거다. 분명 서로 도움이 될 부분이 명확히 있어 보였고, 연락이 올 거라 생각했는데 안 온 적도 많았다.
나를 어필하는 것에 어쩔 수 없이 익숙한 것이지, 그때마다 떨린다. 누군가에게 명함 한 장을 꺼내서 소개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같은 뮤지션이 한두 명이겠냐. 유학 갔다 온 사람이 한두 명이겠냐.'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자연스럽다.
언젠가는 소개가 필요 없는 날이 온다. 이렇게 스스럼없이 소개할 수 있는 것도, 지금 시기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40대, 50대가 되어서도 사람들에게 먼저 명함 들고 다가가서 말 걸겠나. 살짝 자존심 상할 수도 있는 일이다. 지금의 나는 그 긴장감과 설렘을 즐기고 있다. 누려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