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ADHD와 나

잠시 멈춤

by 이가연

9월에 영국 가는 비행기를 끊고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이렇게 돈을 쓰기만 해도 되는 걸까. 다음은 내년 2월에 가기로 이미 마음속으로 정했는데, 이런 식으로 계속 살아도 되는 걸까.' 하는 잡념이 일었다.


그런 잡념에 휩싸이기는 쉬워도, 나는 나에 대해 잘 알고, 잘 살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본인 상태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처방을 내리는데 능하다. 지금 나의 상태는 올해 내내, 서울에 높은 건물, 아파트만 봐도 답답하고, 길거리에 한국 사람들이 한국말하면서 바글바글하면 스트레스 받는다. 이민 가고 싶어서 유학을 갔던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바뀔 기미가 안 보인다.


돈만 쓴다면 일본에 휙 다녀올 수 있다. 확실하고도 긴급한 처방이다. 그 정도는 아니라면, 콘서트나 뮤지컬을 봐도 여행과 비슷한 효과가 난다. 지난 봄을 떠올려보아도, 오사카도 콜드플레이 공연도 다 직전에 예매했다. 일상 속에서 할 수 있는 처방으로는 전시회, 새로운 카페나 외국인이 많은 장소 탐방도 있다.


'언제든지 때려치울 수 있는 능력'도 꼭 필요하다. '그것만 좀 때려치웠으면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라는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뉴스들이 주변에 너무 많다. 학교, 직장, 인간 관계 할 거 없이, 내가 숨이 막히고 죽을 거 같으면 바로바로 그만둘 줄 알아야 한다. '그건 무책임한 것이 아니냐' 혹은 '돈 벌어야 하는데 어떡하냐.'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나를 가장 우선시하지 않는 것이 가장 무책임한 일이다. 세상에 태어났으면 나를 살리는 것 외엔 다 선택 사항이다. '돈'이 걸려있다 하더라도, 당장 노숙해야 하거나 무료 급식소에 가야 밥을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만두는 걸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고 있는 게 맞다.



나는 2015년 가을부터 정신과와 심리 상담을 달고 살았다. 지금은 병원도 가지 않고, 상담도 받고 있지 않지만, 평생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하다. 암울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이 과정을 통해, 스트레스 해소 능력과 회복탄력성이 일반 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한다.


혹자는 ADHD인이 비 ADHD인에 비해 자살 위험이 높다고 하지만, 난 오히려 반대의 경우도 있다고 생각한다. 워낙 어릴 때부터 남들과 다르고 크고 작은 어려움이 많았어서, 그 과정을 잘 이겨낸 성인 ADHD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장착하고 있다.


게다가 ADHD인은 원래 일을 벌여놓고 못 끝내는 경우가 많아서, '잠시 멈춤' 상태에 있는 것이 익숙하다. 예를 들어, 지금 해외에 이력서 보내는 일을 멈췄다. 그렇지만 이번 생에 해외 살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믿음이 있어서 그냥 잠시 멈춤 상태로 느껴진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스스로를 바라볼 때에도, '일본 워홀도 알아봤다가 접고, 박사도 알아봤다가 접고, 해외에 이력서도 몇 번 보내보고 접었네?'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나는 그러면서 경험과 깨달음을 쌓는 게 당연하다.


그만큼 나에 대한 믿음이 강하니 가능하다. '언제든지 때려치울 수 있다'는 건, '언제든지 다시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건 영원한 멈춤이 아니라, 잠시 멈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죽고 싶을 때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해외에서 한 달 살고 돌아왔다면 살았을까. 나는 하라나 설리가, 죽었다고 위장하고 지구 어딘가에 살고 있다고 아직도 진심으로 믿고 싶다.


종종 생존자의 슬픔과 책임을 느낀다. 평생 이 '잠시 멈춤'과 '살아 숨쉬는 것 말고는 다 선택'이라는 메시지를 세상에 전할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ADHD 친구